[기획연재] 내고장 부평의 어제와 오늘 ⑩

편집자 주> 본지는 ‘부평의 어제와 오늘을 찾아’라는 기획 기사를 통해, 부평 지역의 과거와 발전과정을 조명하고 향후 부평지역의 발전 방향을 그려보고자 한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계양구가 황어장터 3·1만세운동을 기념해 개최한 연극의 한 장면.

1919년 3월 24일,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 소재 황어장터. 장터에 모여든 수백명의 군중들 속에서 갑자기 한 청년의 만세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장날이었던 이 날, 한 사람 두 사람 따라 외치던 만세 소리는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로 퍼져 황어장터는 거대한 함성소리로 뒤흔들리게 되었다.

만세를 선창하였던 이는 당시 부천군 계양면 오류리에 거주하고 있던 심혁성이라는 청년으로, 그는 장터에 파견나와 있던 순사에 의해 곧바로 주재소로 끌려가 후에 징역 8월을 선고받는다. 심혁성이 체포된 후 만세를 따라 부르던 군중들은 시위대로 변모,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1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재판에 회부되는 것으로 사건은 정리가 된다.


황어장날이었던 3월 24일 하루동안에 일어났던 이 날의 만세시위는 인천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 중 가장 대규모의 만세시위 운동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계양구에서는 이 일을 기념해 황어장터가 있던 현 계양구 장기동에‘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을 건립하여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여 두고 있다.

황어장은 본래 3일장과 8일장이 서는 정기 우(牛)시장이었다. 황어장에 대해서는 이미 18세기 중반에 나온 《여지도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부평지역에는 황어장을 포함해 모두 4개의 시장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부평부(富平府)의 북쪽지역인 황어면에는 3, 8일장으로 발아장과 황어장이 있었고, 부의 동쪽과 남쪽지역에는 기탄장과 신기장이라는 이름의 시장이 존재하고 있었다.


1919년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은 대개 장날과 일치하여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도 최대한의 인원을 참여시키고 일본의 감시를 피하려는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황어장날에 발생한 황어장터 만세시위운동은 심혁성이라는 한 청년의 갑작스러운 외침으로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심혁성이 체포된 후 강제 해산된 군중들을 재집결하는 과정에서 미약하나마 지도부가 형성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3월 24일 밤 통문을 돌려 사람들을 다시 모으는 일을 주도한 것은 이 담이라는 인물로, 그는 순사에게 끌려가는 심혁성을 탈환하려는 과정에서 순사의 칼에 맞아 사망한 이은선이라는 사람의 친족이었다.

▲ 인천 3.1만세운동의 중심 인물 중 심혁성은 1919년 3월 24일 당시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황어장터(장리기시장)에서 주민 600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일본에 의해 체포되어 그해 10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상고했으나 11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이은선은 황어장터 만세운동 과정 중 유일한 희생자로 남게 되었는데, 이 담은 이은선의 사망을 확인한 후 사람들을 다시 집결시켜 장기리에 있던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결국 다음 날인 25일, 인천경찰서에서 파견된 지원부대에 의해 시위 가담자들이 모두 체포됨으로써 만 하루만에 만세운동은 막을 내린다.


이틀 후인 3월 27일에 발간된 《매일신보》에서는 이 날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 전말을 보도하고 있다.
“인천시내는 물론이요 부근 일대는 관헌의 취체가 엄중하기 때문에 비교적 평온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일전 강화도의 소요가 도화선이 되어 그 다음에 접근된 김포도 일어났고 다시 그 동네와 인천경찰서 관내의 경계선이 되는 부천군도 불온스런 형세가 있음으로 인천경찰서에서는 만일을 경비키 위하여 23일 화뢰순사부장의 순사 2명을 부평주재소에 임시 응원으로 파견하였더라.
그런데 24일 부평읍 밖 시장에서는 당일이 장날이 되어 다수의 사람이 모여드는 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 이보다 먼저 이곳에 들어와 있는 2~3인의 소요자 등은 군중을 선동하여 만세를 부르고 부평읍내로 들어가서 면사무소를 파괴하였음으로 취체 관원은 군중에게 해산케 하는 한편으로 주모자 몇 명을 검거하였는데,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기개가 높던 다수의 군중은 검거된 범인을 빼앗고자 하여 돌을 경관에게 던지고, 또는 경찰관에게 달려든자도 있어서 위험이 시시 각각에 있었으므로 경관 등은 부득이 발검하여 위협하였으나 오히려 폭행을 계속하였음으로 드디어 피를 흘리게 되어 소요자편에 5~6명의 사상자를 내고, 경관은 간신히 범인을 호송하여 주재소로 돌아왔다는 급보가 인천경찰서에 달하므로 본서에서는 그 날 즉시 편천경부가 순사 10명을 데리고 동지로 급행하였다더라.”


이렇게 하여 사건은 끝이 났으나 관련자들에 대한 판결은 10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내려졌다. 이 때 판결을 받은 인물은 총 6명으로 심혁성이 징역 8월, 이 담이 징역 2년, 최성옥과 김원순이 각각 징역 10월, 임성춘이 징역 1년, 이공우가 벌금 20원의 형을 받았으며, 판결 근거는 보안법 위반이었다.

만세운동의 시초가 된 심혁성은 출소 후 수십년간 약초를 캐며 은둔생활을 하다 만년에 고향인 백석동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감수 :

김현석·부평사편찬위원회 상임연구원
이상범·안남고등학교 역사교사/청소년인권복지센터’내일’ 이사장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