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내고장 부평의 어제와 오늘 ⑧


편집자 주> 본지는 ‘부평의 어제와 오늘을 찾아’라는 기획 기사를 통해, 부평 지역의 과거와 발전과정을 조명하고 향후 부평지역의 발전 방향을 그려보고자 한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1950년대 말 부평미군부대 전경.  


“계양산 서쪽에 고개가 있으니 이르기를 경명(景明)이요, 곧 연해관문(沿海關門)이다.
내가 이 고을에 원으로 와서 관문의 방어를 마음먹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해 9월 그믐에 조칙이 있어 성을 쌓을 제 아전과 백성에게 관문을 막아야 고을이 평안한 점을 설명하였더니 백성들이 즐겁게 역사(役事)에 응하여 주어서 서쪽에 장대를 쌓고 병정훈련 하는 곳으로 삼았다.

문은 지명을 따라 ‘경명’이라 부르고 바다를 바라보며 방어토록하게 하고 ‘중심성’이라고 이름한 것은 무슨 뜻인고 하면, 이것은 읍민의 마음으로써 성을 쌓았은 즉 이것을 우리말로 여럿이 마음과 힘을 모아 성을 만들었다 함이다.

고로 이름을 중심성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요. 때에 군기를 중수하고 모든 나루에 포사들이 이를 굳게 지키는 방법으로 하였다 … (생략) 광서 9년(1883) 계미 10월 행부사 박희방 기록하고 쓰노라”


위의 내용은 고종 20년(1883) 1월 1일을 기해 인천이 개항되자 10월에 부평에서 서곶으로 넘어가는 경명현(일명:징맹이고개)에 부평부사인 박희방이 조정의 명령에 따라 주민들을 동원해 축조한 중심성(衆心城) 사적비의 기록이다.


중심성사적비¹는 경명문루 서쪽 옆에 세워져 있었는데, 인천시가 이를 보존하기 위해 시립 박물관에 옮겨 놓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 중 유엔군의 함포사격에 명중되어 부서지고 비의 대석(臺石)만이 남아 있다. 비석은 높이가 5척, 넓이가 1.5척, 두께는 0.8척에 이른다.

중심성은 ‘성곽실측조사서’에 의하면 석축으로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산 52에 소재하며, 철마산에 있는 상성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조선 말기 부평지역에 중심성을 축조한 것은 조일수호조규²(일명 강화도 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 체결로 인해 조선의 쇄국이 깨지고 개항을 하게 됨으로 인해 외세 침략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침투에 대비하기 위해 축조된 것이다.

인천과 부평은 보장지중지일 뿐만 아니라 인천에서 부평을 거쳐 서울로 들어가는 길은 강화를 경유하는 노정보다 편의하고 거리 또한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이에 대한 대책회의에서 고종은 일본 선박이 인천으로 직항하는 것은 강화로 보다 인천로가 편의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고, 당시 영의정 이최응은 일본인들이 인천·부평로를 잘 알고 있는 이상 편리한 길을 버리고 험로를 경유할 리가 만무하므로 그들 선박이 곧바로 인천·부평으로 향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1996년 당시 삼산동 농경지 전경.  


부평 연안에 대한 방비책이 구체화된 것은 고종 15년(1878) 8월 27일에 이르러 진을 설치하고 포대를 축조하면서 부터이다. 이에 앞서 고종 12년(1875) 운양호의 포격으로 영종진이 파괴되었으므로 인천부를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시킨 바 있는데, 다시 인천과 부평 연안에 전과 포대를 설치하여 그 방비책을 강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인천과 부평 연안의 방비 축조는 두 개의 진과 여러 곳의 포대 축조로 완성됐는데, 고종은 인천의 신설 진을 화도진이라고 명명하고, 부평의 신설 진은 연희진이라고 명명하였다.
연희진포대는 연희진 서쪽 바닷가 용두산에 설치되어 용두포대라고도 한다. 이 포대는 논현포대와 더불어 고종 16년(1879) 연희진이 설치될 때 축조되었는데, 연희진이 관할하였고, 연희포대는 3개좌의 포대가 설치되었으나, 오늘날 그 흔적은 찾을 수 없고 다만 용두산에 축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연희진 포대는 현 인천시 서구 연희동 247번지, 옛 서곶출장소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화도진은 현 동구에 화도진 공원으로 조성되어 역사 속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


1. 중심성은 이 경명현을 중심으로 동서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던 산성인데 현재는 완전히 없어지고 성문인 공해루가 서 있던 초석만이 남아 있다. 성벽을 쌓았던 돌들이 남지 않은 것은 해방 후 미군들이 어느 공사를 위하여 모두 실어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중심성은 계양산 능선을 따라 일자성으로 축조되었으며 중심성에는 성문(경명문)에서 서쪽으로 약 20미터 아래에 <중심사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중심성이 축조된 이 해는 바로 인천이 개항한 해로써 이는 병인양요(1866) 이후 외침의 방어를 일층 강화한 국방시책으로 서해안 방어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고개에는 문루를 세워 아래는 경명문이요, 문루는 공해루라 현액하고 부평8경을 누상에 걸었다


2. 1875년 일본 군함 윤요호가 강화 해협을 침범. 윤요호 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조약 체결을 강요. 강화도 조약 체결(1876) 조선 정부의 의견이 문호 개방 쪽으로 기울어 조약을 체결함 모두 12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짐

감수 :

김현석·부평사편찬위원회 상임연구원
이상범·안남고등학교 역사교사/청소년인권복지센터’내일’ 이사장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