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내고장 부평의 어제와 오늘 ⑦

편집자 주> 본지는 ‘부평의 어제와 오늘을 찾아’라는 기획 기사를 통해, 부평 지역의 과거와 발전과정을 조명하고 향후 부평지역의 발전 방향을 그려보고자 한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1977년 8월 30일 청천동 포장공사 준공식.

1911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펴낸 <조선철도여행안내>라는 책에는 인천역까지 이어지는 경인선의 각 역들과 함께 부평역에 대한 짤막한 소개의 글이 적혀 있다.
“역의 서쪽 1리는 구부평군청 소재지인 부평읍으로 김포, 통진, 강화 등의 요로에 해당한다. 서북일대는 부평의 옥토로 땅이 비옥하고 수전을 하여 농산물이 많다. 다만 종종 한강이 범람해 며칠 동안 물이 빠지지 않아 호수가 되기도 한다.”
부평역 근처의 명승지로 계양산을 소개하며 이규보의 시를 덧붙여 놓은 안내서를 보고 있으면 ‘부평’이라는 조선의 고을은 벌써부터 고적이 되어 버린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근대도시의 출현이라는 것이 전통도시의 소외를 전제로 하여 출발한 것이라면, 서울과 인천을 1시간 생활권으로 묶어버린 철도의 탄생은 전통도시의 변두리화를 가속화시키기에 충분한 근대 시설물이었다. 계양산과 문학산 사이를 가로지르며 개항장과 서울을 일직선으로 연결시켜 버린 경인선의 건설로 인해 부평도호부와 인천도호부는 ‘구읍(舊邑)’의 자리로 서서히 밀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을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는 인력과 물자의 흐름은 또 다른 도시의 축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니, 근대화의 여정이란 새로운 공간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평 역시 그러한 공간의 재구성을 통해 근대 속으로 조금씩 발을 내딛고 있었다.

부평에 철도역이 처음 생기게 된 것은 경인선의 개통과 함께였다. 1897년부터 공사가 시작돼 1899년 9월 13일 개통식을 거행한 경인선은 이듬해 한강철교를 완공하면서 끝이 났다. 개통 당시의 정차장은 인천역, 축현역, 우각리역, 부평역, 소사역, 오류동역, 노량진역 등으로, 열차는 오전, 오후 1회씩 하루에 모두 2회 운행하였으며, 오전 7시에 인천역을 출발한 열차는 부평역에 7시 36분에 정차한 후, 종착역인 노량진역에 8시 40분에 도착, 총 1시간 40분이 소요되고 있었다.

운행 첫날 200여명에 불과하던 승객들이 1910년 무렵이 되면 인천역의 승하차 인원만 20여만명을 넘어서고 있었으니 철도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가 기획되어 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순서였을 것이다.

▲ 1966년 4월 29일 경찰학교 졸업식 풍경.

부평은 본래 군사적 방비를 위해 전략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던 도시였다. 고려시대 안남도호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나, 병인·신미양요를 거치고 일본 운양함의 포격을 받은 후 연희진을 설치한 것이나 모두 서울의 인후지지로서 부평의 군사지리적 중요성에 주목하였기 때문이었다.

인천이 개항한 해인 1883년에는 서곶에서 부평으로 넘어오는 징맹이고개에 중심성(衆心城)을 축조하고, ‘중심성사적비’라는 것을 세워두었는데, 지금은 비석은 없어지고 비석을 받치던 대만 남아 있지만 이 비문에, ‘계양산 서쪽에 고개가 있으니 이르기를 경명이요, 곧 연해의 관문이다. … 이해(1883) 9월 그믐에 조칙이 있어 성을 쌓을 제 아전과 백성에게 관문을 막아야 고을이 평안한 점을 설명하였더니 백성들이 즐겁게 역사에 응해주어 서쪽에 장대를 쌓고 병정훈련을 하는 곳으로 삼았다. … 중심성으로 이름한 것은 읍민의 마음으로써 성을 쌓은 것인즉 이것을 우리말로 여럿이 마음과 힘을 모아 성을 만들었다 함이다 …’라고 쓰여 있었다 하니, 부평읍민들이 자발적으로 성을 쌓고 그것을 성의 이름으로까지 붙여놓을 정도로 부평은 군사적 방어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개항장으로 선정된 제물포 일대 역시 본래는 군사적 방어를 위해 포대를 축조하고 화도진을 설치한 지역이었으니, 인천과 부평은 연안방비를 위한 요지였던 한편 그만큼 서울과의 연관성이 큰 지역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었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국가를 방어하기 위한 기능이 우월한 곳이었기 때문에 근대개항지로 선정되었다’는 말은 설득력을 갖는다. 부평이 개항과 일제시대를 거치며 근대화의 표본으로,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군수도시로 변모해가는 것도 어쩌면 이러한 전통과 근대의 모호한 혼합 속에서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른다.

감수 :

김현석·부평사편찬위원회 상임연구원
이상범·안남고등학교 역사교사/청소년인권복지센터’내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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