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내공장 부평의 어제와 오늘 ⑥

편집자 주> 본지는 ‘부평의 어제와 오늘을 찾아’라는 기획 기사를 통해, 부평 지역의 과거와 발전과정을 조명하고 향후 부평지역의 발전 방향을 그려보고자 한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1971년 여름 부평시장의 풍경.


경인교대 앞 사거리는 매년 10월이 찾아오면 조선시대 임금의 행차를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울긋불긋한 깃발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계양구청이 계양산 축제의 메인 행사로 재연하고 있는 정조대왕(재위기간 : 1776∼1800) 어가 행렬이다.

이 행렬은 부평초등학교¹운동장에 있는 작은 연못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길을 멈춘다. 이 연못의 축대 한 켠에는‘욕은지광서정해(浴恩池光緖丁亥)’라고 음각 된 돌이 하나 끼워져 있는데,‘광서’는 청나라 덕종 때의 연호²이고, 정해년은 1887년에 해당하니, 고종 24년에 보수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욕은지와 그 바로 옆에 위치한‘어사대’는 조선의 임금이었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가는 길에 부평에 들러 활을 쏘고 손을 씻은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정조는 재위 21년(1797), 8월 15일부터 20일까지 김포에 있는 장릉(章陵)을 거쳐 화성에 있는 현륭원(顯隆園 : 후의 융릉)을 찾아 참배하는 행행(行幸 : 임금이 궁궐 밖으로 거둥 하는 일) 길에 오른 적이 있다. 총 260여리의 거리를 5박 6일간에 걸쳐 이동하게 되는 이 때의 일정 중, 정조의 어가 행렬은 8월 16일 낮에 부평에 잠시 들러 휴식을 취한 후 안산으로 향하게 된다. 정조가 활을 쏘았다면 이 때 하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바는 아직 없다.

16일 하루동안 김포에서 부평까지 30리, 부평에서 안산까지 40리 길을 가야했으니 정조의 어가 행렬이 부평에 머문 기간은 몇 시간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동안의 방문이 현재 구민의 축제로까지 계승되었으니 임금의 거동이란 그만큼 큰 걸음이었던 것일까.


부평초등학교 안에는 이외에도 부평도호부청사의 건물이 일부 남아 전해지고 있다. 본래 학교의 교사로 사용해 오던 것을 1968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인데, 옮기는 과정에서 일부가 없어져 현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건물만이 남아 있다.


▲ 1972년 10월 철마산 노선버스 개통식


18세기 중반에 나온 ‘여지도서’에 따르면 부평부의 공청 건물은 객사가 21칸, 아사가 47칸 반, 연무청이 10칸, 군기고가 6칸이라 하였으니, 사라진 건물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가 있다. 남구 문학초등학교 안에 남아 있는 인천도호부청사 역시 객사와 동헌건물의 일부만이 제자리를 잃은 채 전해지고 있어 제물포라는 신도시의 개발과 이어지는 일제의 침략을 겪으며 뒷 간방 신세를 면치 못했던 조선인의 터전을 보는 듯해 씁쓸함을 더하고 있다.

부평도호부청사 건너편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운동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데, 수령이 600년이 넘어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평 토박이 중에서 어린 시절 부평초등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천둥번개가 치던 날 욕은지에서 솟아오른 이무기가 은행나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용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던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그 이야기를 뒷받침해주듯 은행나무 한쪽에 큰 구멍이 나 있어 아이들이 놀이터로 이용하곤 했다고 전하고 있다.
공공 건물 말고도 지금은 거의 터만 전해지고 있지만 부평지역 곳곳에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집이나 정자 터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 중 서구 가정동에 위치한 가정지(佳亭址)는 조선의 개국공신 조반³의 별장 터로 그의 아들 조서강⁴이 만년에 이곳에 들어와 조정의 부름을 거부하며 칩거하던 곳이기도 하다.

세종이 화공을 보내 그의 처소를 그리게 하였더니 여러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읊은 시들이 여럿 전하고 있다. 정인수의 시에는‘그림이 의연하여 다시 나아가 보니, 긴 방죽에 별장은 청산을 마주하네, 서리가 감나무와 밤나무에 내려 가을이 저물고, 비가 뽕나무와 삼을 적시니 이랑이 한가롭네, 남포로 돌아오는 돛배는 맘껏 볼만하고, 뒤뜰의 성긴 대나무는 족히 얼굴을 열게 하네, 그대가 일찍부터 강호를 좋아하는 성품 지녔음을 알았더니, 다른 해에 물러나 절로 한가롭구려’라고 하여 그림 속에 비친 가정 주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1.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1동 943번지 미륵당길28 소재하고 있다. 이는 95년 계양구가 분구한 결과다.
2.중국에서 비롯되어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아시아의 군주국가에서 쓰던 기년법
3. 고려 말·조선 초 문신.
4. 조서강은 조선 개국 공신 조반의 아들로 1415년(태종 15) 과거에 급제해 장령을 지내고 1431년(세종13)에 춘추관 기주관이 되어《태종실록》편찬에 참여하고, 우관원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 형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441년에 도승지를 지냈으며, 1443년 이조참판이 됐다.


감수 :

김현석·부평사편찬위원회 상임연구원
이상범·안남고등학교 역사교사/청소년인권복지센터’내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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