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내고장 부평의 어제와 오늘 ⑤

편집자 주> 본지는 ‘부평의 어제와 오늘을 찾아’라는 기획 기사를 통해, 부평 지역의 과거와 발전과정을 조명하고 향후 부평지역의 발전 방향을 그려보고자 한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1949년 1월 1일 당시의 경인철도 인천역사와 건널목 풍경.

연산군 10년(1504) 4월, 의금부 도사 신함이 제주도로 귀양가 있던 환관 김순손이라는 자의 머리를 베어 들고 돌아왔다. 연산군은 동료 환관¹들로 하여금 그의 잘려진 머리를 돌려보게 한 후,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자가 있으면 죄를 물었다. 이것도 모자라 이듬해 1월에는 김순손의 뼈를 가루로 만들어 강 건너로 날려버렸고, 곧이어 그 아비는 참형²에, 그 족친들은 모두 노비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그 해 8월 24일 김순손의 고향이라 하여 부평을 금표 안에 넣어 혁파시킴으로써 부평이라는 지명은 완전히 지도상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부평에 살던 백성들이 모두 부평 밖으로 내쫓기고 난 후이다.
 
한 인간과 그 주변을 이토록 철저하게 말살시켜 버릴 만큼 연산군을 증오심에 불타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발단은 10여년 전의 시간 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495년 6월 29일 연산군이 즉위한 지 6개월 정도가 흐른 이 날 연산군은 갑자기 “김순손을 의금부에 하옥해 1백대의 매질을 한 후 외지의 군역으로 충당하여 휴식할 틈도 주지말고 힘든 일만 시켜라”는 지시를 내린다. 연산은 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다.
다만 중간에 사람을 보내 정말 고생을 하고 있는 여부만을 확인 한 연산군은 결국 1년여가 지난 후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김순손을 처형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나 아직 선왕에 대한 삼년상³이 끝나지 않은 시점인데다, 구체적인 죄명도 알지 못한 채 관원을 사형에 처할 수는 없다는 대신들의 반대로 인해 김순손의 처형은 10년간 집행되지 못했다. 연산군은 단지‘임금에게 오만하였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만 말할 뿐 김순손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이야기하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김순손의 사형집행을 둘러싼 왕과 대신간의 논쟁만이 지루하게 이어져 갈 뿐 연산군이 재위하는 동안 김순손의 죄는 공식적으로는 밝혀지지 못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이 ‘왕이 초상 중에 암수 말을 내정에 끌어들여 그 교접하는 것을 구경하고 또 행위가 부도한 짓이 많아 순손이 간하여 말렸으므로 왕이 노하여 반드시 죽이려 한 것이다.’라고 하거나, ‘왕이 일찍이 술에 취하여 선왕조의 후궁을 간음하려 하므로 순손이 간하니 왕이 노하여 죽이려 하였다.’라고 평을 하고 있으니, 결국 연산군에 대한 환관의 간언에 의해 부평은 한때‘옛 부평(古富平)’이 돼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중종반정⁴ 직후 다시 복구되기는 하였으나 부평은 이외에도 이러한 괘씸죄에 걸려 그 지위가 깎아 내려지는 경험을 몇 차례 겪게 된다.

▲ 1950년 십정·주안 염전

앞서 세종 20년(1438)에는 부평도호부가 부평현으로 강등된 적이 있다. 세종은 한양과 좀더 가까운 곳에서 온천욕을 즐길 수 있도록 이미 4년 전부터 부평에 사람을 보내어 온천을 찾아보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곳 아전과 백성들이 부평에 온천수가 있다는 말만 떠들어 대고 있을 뿐 정확한 위치는 말하는 자가 없으니 2백 명의 인력을 동원해 땅을 파보아도 찾을 길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현대는 온천수가 쏟아져 나오면 땅값도 오르고 관광지로도 개발되어 환영받을 일이겠지만, 세종은 당시 주변 백성들이 차후에 번거로운 일이 생길 것을 우려해 숨기고 있다고 판단, 고을의 명칭을 깎아 내리는 죄를 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현재 경인교대가 들어서 있는 중구봉 아래에 온수골이라고 불리는 골짜기가 있고, 한때 부평의 영역 안에 속해있던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에는 수맥탐사 결과 온천수의 존재가 확인될 뿐만 아니라 병이 있는 사람이 이 곳 물을 마시고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깨끗이 낫는다는 속설이 전하고 있다고 하니, 세종 때의 온천소동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닐 터이다. 부평현은 세종 28년(1446)이 되면 다시 도호부로 복구가 된다.

이 밖에 숙종 24년(1698)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과 그의 비가 묻혀 있는 장릉(章陵)에 최필성이라는 자가 불을 질렀는데, 그의 고향이 부평이라 하여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숙종 33년(1707)에 도호부로 복구되기도 하였다. 수 차례에 걸친 읍격의 변화를 겪으며 부평은 조금씩 조선의 행정조직 속에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환관 : 거세(去勢)된 남자로서 궁중에서 벼슬을 하거나 유력자 밑에서 사역되던 자.
*참형 : 칼로 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
*삼년상 : 아들이 부모의 상(喪)에는 3년 동안 거상하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아버지가 죽으면 참최복(斬衰服)을 입고 3년 동안 거상하고, 어머니가 죽으면 자최복(齊衰服)을 입고 3년 동안 거상을 한다.
*중종반정 : 1506년(연산군 12)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이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晉城大君:中宗)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감수 :

김현석·부평사편찬위원회 상임연구원
이상범·안남고등학교 역사교사/청소년인권복지센터’내일’ 이사장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