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내고장 부평의 어제와 오늘 ④

편집자 주> 본지는 ‘부평의 어제와 오늘을 찾아’라는 기획 기사를 통해, 부평 지역의 과거와 발전과정을 조명하고 향후 부평지역의 발전 방향을 그려보고자 한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개축 전의 부평도호부 청사.

“무릇 군현의 이름 가운데 주(州)자를 띤 것은 모두 산(山)자, 천(川)자로 고치라.”
태종 이방원은 재위 13년이 되던 해(1413), 고려의 잔재를 청산하고 고을의 등급을 명확히 하려는 목적으로 지방 행정구역의 명칭을 전면적으로 개정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에 현감이 파견된 과주(果州)는 과천(果川)으로, 금주(衿州)는 금천(衿川)으로 바뀌는 등 대대적인 지명변경이 단행됐다.
고려말 공양왕 때 잠시 경원부가 되기도 했으나 오랫동안 인주(仁州)라는 명칭으로 불려지고 있었던 인천지역 역시 이 때 인천군(仁川郡)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역사상 인천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인천시는 이 날을 기념해 태종의 조치가 내려진 10월 15일을 ‘인천시민의 날’로 제정, 관련 행사를 갖고 있기도 한다. 이는 이웃 고을 부평지역이 이미 부평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워지기 시작한지 백여년이 지나고 있던 시점이었다.

부평이라는 행정 지명이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충선왕 2년(1310)의 일이다. 이 때 전국의 목(牧)을 폐지하면서 길주목(吉州牧)이었던 부평지역을 부평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읍격을 낮추어서 부(府)로 삼은 것이다. 당시 부평부가 관할하고 있던 주변 고을로는 모두 여섯 개의 현이 있었는데, 금주, 동성현, 통진현, 공암현, 김포현, 수안현으로 대개 김포반도에 위치해 있던 고을들다. 이미 부평은 고려시대를 거치는 동안 수주, 안남, 계양, 길주라는 지명의 변천을 겪어온 후였다.

통일신라시대 장제군이었던 부평이 수주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 것은 고려 초의 일이다. <대동지지>에서는 태조 23년(940)이라 하고 있다. 수주 고을이었을 때 청사가 계양산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확인되지는 않는다.
수주는 의종 4년(1150)이 되면 안남도호부로 바뀐다. 안남도호부라는 명칭은 본래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군을 멸한 후 전주(全州)에 설치한 기구로 고유명사로 보기는 어렵다. 전주에서 시작해 여러 지역을 거친 후 마지막으로 부평에 설치가 되었으니 통일신라시대 변방 고을에 불과했던 부평이 개경 방비를 위한 요지로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안남도호부는 65년간 명맥을 유지하다 고종 2년(1215) 계양도호부가 되었다. 계양도호부 시절에는 <동국이상국집>으로 유명한 이규보가 부평부사로 좌천되어 들어와 1년간 머물면서 여러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규보는 고종 6년(1219) 5월 계양도호부사로 부임해 이듬해 6월에 서울로 올라갔는데, 인하대 국문과 교수를 지낸 정기호 교수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이규보가 부평에 머물면서 지은 시문만 60편을 넘어서고 있다. 그 중 읍지 등에서 앞다투어 소개하고 있는 글이 <자오당기>라는 글인데, 이는 이규보가 부평에 들어와 자신과 가족들이 머물 관사에 ‘스스로 즐거워한다’는 뜻의 ‘자오당(自娛堂)’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손님과 대화를 나누며 심회를 읊은 글이다.
자오당 터는 현재 계양구의 배수지 언덕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그 흔적을 전혀 찾아볼 길이 없다. 다만 ‘깊은 산 옆, 풀과 갈대가 우거진 사이에 한 쪽이 무너져 마치 달팽이의 부서진 껍질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곳을 태수의 거처로 삼았다’는 이규보의 말을 읊조리며 그 시절의 풍경을 상상 속에 떠올려 볼 뿐 따름이다.

▲ 1980년대 부평도호부 청사 전경.

계양도호부는 충렬왕 때 길주라는 이름으로 다시 바뀐다.
‘길(吉)’이라는 한자가 지명에 들어가게 된 것은 흔히 충렬왕이 매사냥을 즐기던 사실과 연관지어 설명되고 있다. 매사냥을 즐기던 충렬왕이 매를 기르는 응방을 부평에 설치하고 이 곳을 즐겨 찾았다는 것이다.
이미 작고하신 조기준 박사의 ‘부평사연구’에 의하면 현재 계양구와 서구를 연결하고 있는 징매이고개란, 매를 징발하던 의미로 ‘징매’(徵鷹)한 고개라고 불리던 것이 발음이 바뀌어 그렇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길주목은 충선왕 2년(1310)이 되면 비로소 부평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길주가 부평으로 바뀌게 된 것은 전국의 목(牧)을 없애는 조치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왜 부평이라는 이름으로 변경이 되었는지는 아직까지 확실한 근거를 찾을 길이 없다.

고려사의 권위자인 국민대 박종기 교수는 ‘오백년 고려사’라는 저서에서 우리가 경험했던 ‘또 하나의 전통’인 고려시대를 새로 찾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조선뿐만 아니라 고려 역시 우리가 갖고 있는 전통의 일부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만큼 고려는 아직 우리에게는 멀고 낯선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부평은 그나마 13개월 동안 계양 고을에 머물렀던 이규보가 남긴 글들로 인해 충분하지는 않지만 당시 부평의 모습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다가설 기회를 갖고 있으니 다행이다. 또 하나의 부평인 고려시대 부평이라는 공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감수 : 김현석·부평사편찬위원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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