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내고장 부평의 어제와 오늘 ②

편집자 주> 본지는 ‘부평의 어제와 오늘을 찾아’라는 기획 기사를 통해, 부평 지역의 과거와 발전과정을 조명하고 향후 부평지역의 발전 방향을 그려보고자 한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고려시대의 문인이었던 이규보는 <망해지>라는 그의 글에서, ‘(계양) 고을의 수령으로 좌천되어 와서 주변을 돌아보니 물이 푸르고 넓어 섬 가운데 들어온 듯 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계양도호부 부사로 재직한 바 있는 이규보의 눈에는 ‘한 면만 육지로 통하고 삼면은 모두 물인’ 계양 고을이 마치 외딴 섬처럼 비추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1871년경에 작성된 <부평부읍지>에서는 ‘서쪽 한 면만이 바닷가에 접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규보가 한 말은 잘못이라고 토를 달았다. 같은 땅을 바라보면서 다른 풍경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의 시간의 흐름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조선후기까지도 부평의 평야는 하천의 범람으로 인해 갈대가 우거진 습지가 대부분이었다니 고려, 조선 두 시대간의 차이가 그리 크지야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땅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과 땅에서 살고 있는 토착인 사이의 감성의 차이가 그런 엇갈린 표현을 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근대 이전 부평은 서해와 한강 사이 섬과 같은 곳

정도의 차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근대로 넘어와 대규모 개간과 시가지 개발이 추진되기 전까지는 부평지역은 그야말로 섬과 같은 곳이었다. 1994년 계산택지개발사업 당시 행한 지표조사에 따르면 땅 속에 뻘층이 두텁게 존재하고 있어 이 지역까지 바닷물이 들어온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서해와 한강 사이에 위치해 있으면서 홍수가 날때마다 굴포천이 범람하던 부평평야는 바닷물과 민물이 들이치던 ‘거칠고 습기가 많은 땅’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부평사람들은 부평에 시가지가 형성되기 이전에는 대개 산과 인접한 곳에 모여 마을을 이루며 살았으리라고 여겨진다.
계양산에서 시작해 징맹이고개를 넘어 천마산, 원적산, 만월산, 금마산으로 이어지며 부평을 감싸안고 있는 산 아랫녘이 오랫동안 부평에 사람들이 살아왔던 터전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수천, 수만 년 전의 선사시대 사람들이 부평땅에 들어와 살았다면 그들 역시 부평의 산록을 그들의 거주지로 삼아 머물렀으리라고 본다. 바닷물과 민물의 범람은 농사짓는 땅으로서는 골칫거리였을지 몰라도 선사시대 사람들에게는 풍부한 수자원을 제공해주는 식량창고인 셈이다.
하지만, 부평지역에서 선사시대 유적은 거의 보고되고 있지 않다. 발굴에 대한 무관심과 숨가쁘게 진행되어 온 개발사업의 결과다. 선사유적의 흔적을 찾아낼 가능성은 앞으로도 희박해 보인다.

▲ 인천 대곡동 지석묘분 전경. (김포 쪽에서 바라본 대곡동) A-1기. B-6기, C-75기, D-8기


3점의 돌도끼, 부평의 선사유물로 자주 언급

초대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지낸 이경성은, 1959년에 발표한 <인천의 선사유적유물 조사개요>에서 해방 이후 인천에서 행한 최초의 고고학적인 발굴은 1957년 11월 30일에 행한 주안고인돌의 발굴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전까지의 작업은 우연한 기회에 얻어지는 수집, 조사 차원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초기의 수집 목록 중에 부평지역에서 발견된 3점의 돌도끼가 포함되어 있어 지금까지도 부평의 선사유물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가장 먼저 발견된 것은 1954년에 인천에 살고 있던 박국성이라는 사람이 계양산에서 발견한 돌도끼 파편으로, 원형의 4분의 1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길이가 9.8cm, 폭이 8.8cm나 되는 것이고, 1955년에 노해경이라는 사람이 경서동에서 발견한 길이 13.3cm, 폭 6cm의 돌도끼, 그리고 1957년 인천공업고등학교의 한 학생에 의해 계산동에서 발견된 길이 12.5cm, 폭 5cm의 돌도끼가 전해지고 있다.
돌도끼라는 것이 신석기시대 이후의 유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의 발견 지점을 고려할 때, 계양산 인근 주변은 신석기 이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던 주요 주거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추가로 발견되고 있는 유적, 유물들이 없으니 뭐라 단정하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다행히 김포지역으로 다가서면 그나마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인 고인돌들이 산재해 있어 선사시대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서구 대곡동에 위치한 대곡동 고인돌군은 최근에 들어와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그동안 최대 30여기 정도의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던 대곡동 고인돌군은 2005년에 실시된 지표조사 결과 가현산 북록을 중심으로 70여기의 고인돌이 추가로 확인되어 학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인하대학교 박물관 견수찬 학예사는 “이번 지표조사를 통해 밝혀진 대곡동 고인돌군은 그 숫자나 밀집도 면에서 볼 때 중부내륙지방에서는 최대 규모라 할 수 있다” 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강화도 고인돌의 경우도 강화도 전체에 걸쳐 130~140여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대곡동의 경우 반경 수㎞ 내에 강화도에 버금가는 100여기 정도의 고인돌이 밀집되어 있어 청동기시대 이 지역에 존재하고 있던 부족의 규모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선사시대의 부평은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 지금까지 발견, 혹은 발굴된 유적들도 대개 인천에 편입되기 이전 경기도에 속해 있던 지역들에서 찾아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부평지역의 선사문화를 복원해내는 작업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하더라도 앞으로 김포 반도나 해안가, 혹은 인천의 주변 섬들에서 발견되고 있는 선사유적을 통해 그 유사성을 탐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현존하는, 그리고 가능성이 있는 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를 진행시킨다면 선사문화의 일부만이라도 밝혀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된다.

감수 : 김현석·부평사편찬위원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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