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탈춤 기능보유자 김애선씨

편집자주>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부평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부평신문은 부평의 자연, 역사, 인물, 문화를 찾아 독자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우리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키우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한다. 지역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지역발전의 주춧돌이 될 것이라 믿으며.

부평구 일신동에 거주하는 김애선(69)씨는 현재 우리나라에 네 명뿐인 봉산탈춤(무형문화재17호)의 기능보유자(인간문화재) 중 한사람이다. 우리 구에서 8년째 살고 있는 그녀는 아버지 김진옥(봉산탈춤 기능보유자 1892∼1969)씨의 대를 이어 보유자들 가운데 가장 어린 53세로 목중과 상좌, 소무역(봉산탈춤의 등장인물)의 기능보유자가 됐다.
황해도 봉산이 고향인 김애선씨는 어린 날들을 방안 가득한 탈바가지들과 아버지의 활달한 춤사위로 회상한다. 아버지의 춤자락을 매일같이 보았던 어린 김애선에게 탈춤을 배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봉산탈춤 4과장(노장춤)에서 원숭이 역을 맡았던 언니가 출가하자 그 역을 대신하며 첫 무대에 오른 것이 겨우 다섯 살 때다.

 

유일한 봉산 출신 춤꾼, 고향 땅에서 춤추고 싶다

그녀가 남하한 것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아홉 살이 되던 해다. 아버지 김진옥은 월남 이후 봉산탈춤 재건에 열의를 쏟았고 그 결과 1967년 6월 17일 봉산탈춤이 무형문화재 17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2년 뒤 김진옥이 뇌졸중으로 타계하면서 김애선만이 유일한 봉산 출신의 춤꾼이 되어 1989년 기능보유자가 된다.
“봉산출신 춤꾼은 저 한 사람뿐이에요. 항상 북녘 고향에서의 공연을 꿈꿔왔는데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가 버렸네요. 이후에 통일이 되면 전수자들이 황해도 봉산에 가서 공연을 할 수 있겠지요. 봉산이 고향인 제가 살아생전에 공연할 수 있다면 또 다른 감격일 거에요. 꼭 한번 고향땅을 밟으며 춤사위를 놀리고 싶습니다”
아버지 김진옥은 봉산탈춤을 가장 원형에 가깝게 추던 연희자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김애선씨는 “남한에서는 아버지의 전수로 봉산탈춤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만 본고장이랄 수 있는 북한에는 연희자가 아무도 없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다. 하지만 봉산탈춤을 기억하는 노인들이 아직 살아있을 것이라며, 그네들이 살아있을 때 공연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 또한 전했다.


그치지 않는 열정 “전수에 힘써야지요”

봄을 맞아 전주에서 마련한 봉산탈춤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김애선씨. 69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국내, 해외 가릴 것 없이 그녀의 ‘봉산탈춤‘에 대한 열정은 그칠 줄 모른다.
“젊은 시절이나 지금이나 춤출 때는 똑같아요. 공연을 마치고 난 후에는 다소 피로를 느끼지만 춤을 출 때의 느낌은 한결같답니다”
그녀는 공연 외에도 탈춤 전수에 힘을 쏟고 있다. 탈춤에 대한 관심이 날로 줄어들고 있는 요즘 ‘봉산탈춤‘을 배우려는 전수자들은 그녀가 지치지 않고 춤을 추게 하는 또 하나의 원동력이란다.

‘무형문화재’란 말 그대로 형체가 없는 문화재다. 사람이 하지 않으면 소멸하고 말 문화재. 김애선씨는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듯 ‘봉산탈춤‘이라는 민족문화의 맥을 잇기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봉산탈춤 재건이 그녀의 아버지 김진옥의 몫이었다면 김애선과 그밖의 기능보유자들, 전수자들, 그리고 봉산탈춤을 아끼는 많은 이들의 보존을 위한 노력은 남과 북을 잇는 민족 얼의 바통이 되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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