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현·인명여자고등학교 교사

 

 

 

 

대입수능 부정 사건에 대해 연일 언론에서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어떻게 이런 대규모의 사건이 일어났으며, 언제부터, 그리고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리고 책임론을 거론하며 학생과 교사, 교육부를 향해 수 없는 돌팔매를 가하고 있다. 대책으로 수능 고사장에 전파 차단기를 설치하겠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관심과 가치관에 따라 수십 가지의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참된 인간의 양성’일 게다. 세계의 중심인 인간, 그 존재 자체로 가치 있고 소중한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가 본을 보여주며 이끌어 가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소임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 현실은 내가 체험한 몇 가지의 구체적 사례를 보더라도 지극히 비교육적이다.
학기 초, 학부모들과의 간담회 시간이었다. 처음 고등학교 생활을 하는 아이들에 대한 걱정과 기대로 모인 학부모들과 함께 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한 학부모는 “아이들의 봉사활동 시간을 학교에서 어떤 방법으로 해결해 주느냐”는 요지의 질문을 했고,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그 부모는 “공부하기에 바쁜 아이들을 위해 봉사활동 시간을 학교에서 서류 상으로 채워주는 학교가 많다. 이 학교는 어떠냐”는 설명을 덧붙여 나를 당황하게 한 적이 있었다.
전일제 활동을 하는 날, 난타 공연을 보기 위해 모인 아이들에게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길 은근히 기대했다. 그러나 공연히 시작되기도 전에 아이들은 “언제 끝나요?” “집에 빨리 가요”라는 말을 쏟아냈다.
학교에서 모의고사를 보는 날 ‘가채점’이라는 것을 한다. 학생들은 자기의 점수를 채점해 제출하고 학교는 그 점수들을 모아 고득점에 해당하는 일부의 학생이 각 반별로 몇 명인지를 확인하는 절차이다. 그 이하의 점수를 받은 아이들이 두 배 이상이지만 점수에 그다지 개의치 않는 것이 모의고사 보는 날의 풍경이다.
‘성적’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양보하고 희생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지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도 대안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더 나아가 그 ‘현실론’이 다른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성장을 위해, 효율적 사회를 위해, 시장의 논리가 교육의 장에서 횡행하고 학생을 성적순에 의해 줄 세우고 학교 또한 등급제라는 이름으로 순위를 매기는 현실이 과연 교육적이라 할 수 있는지, 그것이 인간의 천부인권을 지켜줄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심지어 한 학교의 책임자가 성적이 우수한 1명의 학생을 위해서는 99명의 학생을 희생할 수 있다는 망발까지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주소 아닌가.

현재의 ‘수능 부정’은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이다. 우리의 학교가, 사회가, 역사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수능 부정을 조장하고 부추긴 결과이다. 원칙의 소중함과 바르게 사는 것의 가치보다는 남보다 더 많이 얻고, 더 빨리 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아이들은 해답을 찾은 것이다.
자신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 같은 대입 수능과 경쟁논리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옳고 그름에 대해 명확한 판단과 기준을 잃어 버렸다. 이미 어른들이 그 기준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방법적인 면에서 객관식 일변도의 시험문제로 한 인간의 평가가 이루어지는 입시제도의 개혁도 중요하지만, 결과 위주의 교육이 아닌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 중심 교육,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회를 위한 가치를 추구하는 교육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얼굴과 미래에 점수를 매기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그만두지 않는 한 ‘수능 부정’의 고뇌와 상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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