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를 맞는 감회는 사람마다 다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곧장 사회에 진출하면서 설레기도 하고, 인생의 전환기라 할 수 있는 40대에 들어서면서 마음가짐을 곧추세우기도 한다.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며 기대와 우려에 휩싸이는가 하면, 첫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며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고3에 올라가는 자녀를 보며, 또는 군 입대를 앞둔 아들을 보며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렇듯 새해는 사람마다 다르게 다가온다. 누구든 새해맞이가 특별하지 않겠냐마는, 우리 이웃들의 조금은 특별한 새해맞이를 들여다봤다.



10월이면 개성공단에서 학생복 생산
명인패션 사장 정종철씨

2007년 마지막 토요일인 29일 오후 3시경. 청천동에 위치한 학생복(자켓) 제조업체인 명인패션에 들어서니,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공장은 작업자들의 바쁜 손놀림으로 활기찼다.

이곳의 사장 정종철(53)씨는 누구보다 새해가 기다려지는 사람이다. 오는 2월 초 개성공단에 공장 착공식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치열한 경쟁 속에서 개성공단에 공장 부지를 분양받고, 현재 공장 설계에 들어가 있다. 북측 노동자 187명을 고용하기로 신청해 놓았으며, 계획대로라면 10월에 첫 생산품이 나온다.

정 사장이 개성공단에 눈을 돌린 것은 인건비가 남측에 비해 훨씬 적게 들기 때문이다.
정 사장은 “교복 생산은 마진이 박하다. 갈수록 전기요금 등 물가는 오르고, 원가를 절감할 수밖에 없다보니 인건비가 싼 곳을 찾게 된다. 중국이나 베트남은 물류비 등 때문에 갈 수 없다. 개성공단은 임금이 쌀 뿐 아니라, 가까운 지리적 조건에 말도 통하고 동질성이 있어 사업 전망이 밝다”고 개성공단 진출 배경을 설명했다.

또한 정 사장은 “어느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개성공단, 남북경협은 지금의 현상을 유지하거나 더 진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개성공단에 공장을 세우면, 지금 일하는 직원들은 어떻게 될까? 정 사장은 “정리해고는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정 사장은 현 공장에선 지금 생산하고 있는 학생복을 성인 남성 자켓으로 대체할 계획이다. 이미 공장 건물 2층에서 남성 자켓 생산에 들어갔다.

그는 “나이가 들어 자연스럽게 퇴직할 순 있지만 개성공단 진출로 인해 해고 따위는 없다”며, “품질을 높이면 얼마든지 주문을 받을 수 있다. 성인 자켓 생산으로 안정적으로 갈 수 있게 계획을 세우고 현재 실행 중”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정 사장은 새해 바람을 이렇게 전했다.
“맘 편히 기업을 운영할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됐으면 좋겠다. 특히 봉제 산업이 사양사업이라고 하지만 많은 고용창출을 인정해 줘야 한다. 봉제 기업은 신용기관이나 금융권에서 등급을 낮게 평가해 같은 매출의 타 업종 보다 대출 여력이 떨어진다. 아이티(IT) 아이티 하는데, 고용창출을 많이 하는 노동집약적 산업에도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


돈 많이 벌어 집 마련하는 게 꿈
이주여성 양카리나·엄닐다씨

12월 28일 인천여성문화회관에서 이주여성 양카리나(31·삼산1동·사진 오른쪽)씨와 엄닐다(46·부평2동·사진 왼쪽)씨를 만났다. 이들은 매주 목·금요일 이곳 여성문화회관에서 한국어를 배운다. 원래 이름이 길고 어려워 남편의 성씨를 따 개명했다고 한다.

양씨는 페루 출신으로 페루에서 남편을 만나 같이 살다가 아들(한길초 3년·11)과 함께 한국에 온 지 3년째 접어들었다. 엄씨는 홍콩에서 만난 남편과 모국인 필리핀에서 결혼하고 두 아들(6·7)과 함께 만 2년 전 한국에 왔다.

이들의 생활은 한국 주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라면 한국어가 아직 서투르다는 것.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고 있고, 영어를 잘하기 때문에 영어 과외를 통해 번 돈을 살림에 보탠다. 양씨의 남편은 농산물시장에서 일하고, 엄씨의 남편은 교회 전도사 일을 한다.    

양씨는 “말 때문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없는 것이 제일 힘들다”며 “나랑 남편하고는 영어로 대화하고, 아들과 남편하고는 한국어로 대화한다”고 말했다.

때문에 여성문화회관은 이들에게 소중한 곳이다. 일이 생기면 교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해결하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도 만들 수 있다.

이들의 새해 소망은 뭘까? 둘의 새해 소망은 같았다. 돈을 많이 벌어 집을 장만하고, 아이들이 한국어를 빨리 배우는 거란다. ‘에이, 그게 무슨 새해 소망이야’ 할 수 있지만, 당장 처한 현실에서 이들의 바람은 절실함이 묻어 있다.

양씨는 “지금 월셋집에 살고 있는데, 열심히 일해 돈 많이 벌어서 아파트 사고 싶다. 아이들 피아노에 합기도, ‘눈높이’ 과외 시키는 데 돈 만이 든다”고 말했다.

엄씨네도 월세 집에 산다고 했고, 같은 바람이라고 했다. 엄씨는 3월이면 큰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 걱정이 많다고 했다. 영어 과외를 하거나 일이 있어 집을 비울 때 아이가 학교 갔다 돌아오면 돌 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한국인 남성을 따라와 가정을 꾸리고,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새해엔 법적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갖는다. 결혼하고 정착한 지 만 2년이 돼야 주민등록증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직은 외국인등록증이 이들의 신분증이다.


무수한 표정이 있는 연기자 되고파
부평공고 졸업 앞둔 최종찬군

전문계(옛 실업계)를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기보다는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이런 추세를 놓고 볼 때 새해에 부평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최종찬(19·연수구 청학동)군은 특이하다. 자동차학과 34명 중 33명이 대학을 가는데, 최군만이 대학을 가지 않고 다른 진로를 선택했다. 최군이 간 곳은 극단(스타댄스·종로구 명륜2동)이다. 최군이 마임극의 세계에 빠진 계기를 들어보면 재밌다.

“1학년 때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이나 나갔는데, 안 되겠다 싶었는지 하루는 엄마(51)가 내 손을 잡고 째즈댄스학원엘 갔어요. 두 달 만에 10키로, 그리고 5키로가 빠졌어요. 그리고 흥미가 생겨 인터넷 동영상을 보고 저글링 탭댄스를 독학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누나(28) 도움이 컸어요. 누나가 마임을 해보라며 적극 권유했고, 대학시절 알았던 김성구(스타댄스 예술감독) 선생님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당시 김 감독은 최군에게 ‘이 세계에 오면 배고프고 힘들다. 견뎌낼 자신이 있냐’고 물었고, 최군은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무대가 좋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게 행복하니 하겠다’고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을 담임교사가 만류하자, 최군의 누나는 담임교사를 만나 최군의 결정을 지지해주기도 했다. 최군은 3학년 2학기 때부턴 학교의 허락을 받고 2교시가 끝나면 극단으로 달려가 마임을 연습한 후 밤 11시가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마임 연기는 무수한 표정을 탐구하는 직업이라고 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내려올 때 사람들  표정이 모두 달라요.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하며 나름대로 스토리를 만들어 마임 대본도 써보기도 해요”

최군은 자신이 어머니의 손재주와 끼를 물려받은 것 같다고 했다. 최군의 어머니는 아들을 자동차학과에 보내면서 ‘공부에 너무 매달리는 인문계보다 좀 놀고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는 실업계가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임을 한다고 했을 때는 ‘이제 자동차학과에 간 이유가 바뀌었다. 차를 타고 가다 사막에 떨어져도 고쳐서 나올 수 있지 않겠냐’며 최군을 격려했다.

무수한 표정이 있는 마임 연기자가 되고 싶다는 최군은 새해엔 실기능력을 열심히 쌓아 서울예술대학에 들어가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인생의 전환기 마흔살, 이제 새로운 시작
부평노인복지센터 원장 신선아씨

십정동에 위치한 부평노인복지센터(센터) 원장인 신선아(39)씨의 지난 한해는 그동안 살아온 여느 해보다 무척 바빴다. 부평구가 노인장기요양보험 시범사업을 시행하면서 센터가 재가서비스 공급기관으로 선정돼, 복지사업만 하다가 교육 받고 자격 조건을 갖추고 여러 가지 새로운 일을 처리하다보니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바빴던 한해를 뒤로하고 맞는 새해는 신 원장에게 남다르다. 불혹의 나이, 인생의 전환기인 40대에 들어서기 때문이다.

“서른아홉에 내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사십을 맞이해 다행인 것 같다. 심신수련을 통해 내가 터부시했던 것들을 알게 됐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소중하거나 없어서는 안 될 생활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나 스스로를 규정했던 것이 나를 부자연스럽게 만들었고, 주변에서 ‘참 자유롭게 산다’는 이야길 많이 들었는데, 정작 그게 아닌 걸 알았다”

신 원장의 ‘서른아홉 마음의 여행’ 이야기는 더 이어졌다.

“연애·결혼·출산·육아 등은 한마디로 세상 발전에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 기억과 심리를 헤집어 보니 아버지의 영향인 걸 깨달았다. 아버지와 화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었다. 아버지가 많이 아파 화해할 수 없는 상태였다”

신 원장은 홍역을 앓듯이 20~30대를 되돌아보면서, 위기의식과 함께 지금이 인생의 전환기라고 생각했다. 지금 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유연한 자세로 주변 사람들과 일을 품고 안정을 찾은 자신을 마주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자신과 약속했다. 

신 원장은 또한 새해부턴 열심히 공부할 계획도 세웠다. 그는 자신이 왜 공부해야하는지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모든 일이 마찬가지지만 사회복지 일은 과거의 지식이나 경험으론 안 된다. 사회 흐름을 인식하고 새 학문을 빨리 흡수해야 하는 현재진행형이다. 다양하고 복잡해지는 사회만큼 사회복지분야도 마찬가지다. 심화된 교육과 평생 교육이 필요하다”

40대에 닥쳐올 많은 도전과 기회를 놓칠까봐 두렵다는 신 원장. 그는 맘먹은 일을 해내기 위해선 면역성이 많이 떨어진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 꼭 산을 오르겠다는 각오도 빼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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