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주> 1950년생 전쟁둥이인 이입분(69)씨는 두레박으로 퍼 올린 우물물부터 프랑스 산‘에비앙’생수까지 모두 맛본 세대다. 그가 온몸으로 통과한 현대생활사를 물건을 통해 되짚어보려 한다. 이입분씨는 내 엄마다.

겨울옷을 빨고 있다. 뭔가 정리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지만 별 수 없다. 옷걸이에 걸 수 있는 양은 한정돼있으니 계절이 지난 옷은 집어넣는 수밖에. 빈 옷걸이엔 차곡차곡 개켜두었던 봄옷을 꺼내 걸었다. 구깃구깃해진 옷들은 대부분 물을 뿌려 두면 주름이 펴진다. 그런데 딱 하나 하얀 재킷이 문제다. 이 옷은 구김이 잘 가는 데다 한 번 잡힌 주름은 잘 펴지지도 않는다.

입기 전 다림질이 필수다. 구겨진 옷을 보니, 전기가 없던 시절엔 어떻게 옷을 다려 입었을지 궁금해졌다. 한편으론 굳이 다려 입어야할 옷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첫 마디는 의외였다.

“그땐 지금보다 옷을 더 많이 다려 입었어” 엄마가 유년시절을 보낸 1950년대엔, 어른들은 여름엔 삼베옷을 입고 겨울엔 솜이 든 무명옷을 입었다고 했다.

“보통 농사일 할 땐 그냥 빨아서 입었지만, 외출할 땐 삼베옷에 풀을 먹여서 다렸어. 안 그러면 축 늘어져서 후줄근하니까. 겨울에 입는 무명옷은 빨면 쪼글쪼글해지거든. 이것도 풀을 먹여서 다려야 해. 근데 할머니(엄마의 엄마)는 무명솜옷을 빨기 전에 항상 바느질 꿰맨 부분을 다 뜯었어. 천 조각들을 삶아 빤 다음에 말려서 다시 바느질을 해서 옷을 만들더라고. 그 다음에 풀을 먹여서 다림질을 해야지”

옷에 풀을 먹이면 옷감이 빳빳해져 옷을 입었을 때 모양이 살기도 하지만 때가 덜 타는 효과도 있다.

“밀가루가 있을 땐 그걸로 풀을 쑤고, 없을 땐 찬밥으로 죽을 쒔어. 그걸 삼베보자기에 담아서 물에 넣고 조물조물하면 물이 뿌옇게 되잖아. 그 물에 옷을 넣고 마지막으로 헹구는 거야. 마르면서 천이 빳빳해지지. 이때 물이 너무 멀거면 옷감에 힘이 안 생기고, 너무 되면 천이 뚝뚝 꺾여. 농도를 잘 맞춰야 해”

 

풀을 먹인 무명옷은 촉촉할 때 걷어 잘 갠 후 보자기에 싸서 밟는다고 했다. 한참 밟아 천이 판판하게 펴지면 펼쳐서 다듬이질을 한다. 조각난 옷을 꿰매 다시 옷을 만든 후 많이 접힌 부분은 다림질을 한다. 세상에, 옷 한 번 빨 때마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땐 빨래를 자주 못했어. 아주 더럽지만 않으면 겨울이 지나야 옷을 빨았지. 소매는 코가 묻어서 까맣게 반질반질할 정도였으니까. 여름에 삼베옷은 바느질을 뜯어서 빨지 않아서 그나마 편했고. 나는 삼베옷 입은 기억은 없어. 어렸을 때 나일론 천으로 된 옷을 입었어. 이건 구김이 안 가서 다릴 필요가 없었지”

엄마가 기억하는 다리미는 세 가지다. 우선 프라이팬 모양으로 된 통에 숯을 담아 사용한 것이다.

“다림질을 하려면 두 사람이 필요해. 다림판이 없어서 옷을 바닥에 놓고 다릴 수가 없거든. 다리미를 안 든 사람은 양손으로 옷을 잡을 수 있지만, 다리미를 잡은 사람은 양손을 다 쓸 수 없잖아. 그래서 옷 한 쪽은 다리미를 잡은 손 팔꿈치랑 무릎 사이에 옷을 올려놓고 눌렀지. 팔이 고정돼 있어서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려우니까 그냥 주름만 펴는 정도였어”

이 다리미의 큰 문제는 숯에서 나온 불티가 날리고 검은 숯가루가 옷에 묻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로 나온 다리미는 ‘양복다리미’라고 불렀다. 숯을 안에 넣고 뚜껑을 닫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모양은 요즘 다리미와 비슷하다.

“매번 숯으로 다림질을 하기가 쉽지 않았어. 스무 살 넘어서 한창 멋 부릴 땐 정장바지를 요 밑에다 깔고 잤지. 솜 요라서 무게가 있으니까 줄이 잘 섰어. 그런데 잘못하면 쌍줄이 생겼지. 그래도 당시엔 그러고 다니는 사람 많았어”

# 끊이지 않은 화재사고

구김이 잘 가는 천으로 옷을 해 입던 시절엔 집집마다 다림질이 필수였다. 그만큼 이와 관련한 사고도 많았다. 설을 앞두고 설빔을 다리다가 불이 나는 사고가 심심찮게 발생했다.

1924년 2월 4일, 설날을 하루 앞 둔 새벽 서울 낙원동에서 불이 나 집이 전소하고 다섯 살, 아홉 살 형제가 목숨을 잃었다.

“원인은 두 아이들의 설빔을 밤이 늦도록 다린 후 다리미에 불이 다 꺼지지 않은 것을 그대로 마루에 내어 놓았다가 마침내 불이 난 것인데, 손해는 이천여 원이나 된다고”(동아일보 1924.2.6.)

다리미 불이 옷에 옮겨 붙기도 했다.
“빨래를 다리다가 다리미 불이 치마에 튀어 속옷이 타고 살까지 타서 생명이 위독하게 된 사설이 생겼다”(동아일보 1933.4.26.)

인명사고 이외에도 다리미를 사용한 뒤 뒤처리를 잘못해 불을 내 재산 손실을 보는 일이 빈번했다. 1929년에 최초로 전기다리미가 선을 보인 이후에도 화재는 여전했다. 특히 가정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 전선을 따로 내어 사용하는 도전, 이른바 ‘전기도둑’이 횡행했다.

“종로 삼정목 칠팔양복상 의춘우(29) 방에 천정에서 불이 일어났으나 즉시 진화하였는데 원인은 60와트 전기다리미를 도전 사용하다가 전기스위치에서 불이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37.7.6)

“전기 사정이 곤란하다 함은 이미 체험하고 있는 바이다. (중략) 아직도 일부에서는 전기곤로, 전기다리미 등을 사용할 뿐 아니라 심한 자는 중간에서 중간선을 간선으로 변경하여 부정 사용하는 등 전기 규칙을 위반하는 사실이 많음에 비추어 (중략) 그 중 악질 사용자 200여 명을 송청하고 나머지는 29일간의 구류에 1만원 과료 처분을 하였다”(동아일보 1948.5.30.)

# 부정선거에 이용된 다리미

전기가 들어오는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전기다리미 사용이 늘어날 즈음 다리미와 관련한 기가 막힌 사건이 일어났다. 1958년 9월 20일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투표용지 여러 개를 겹쳐 다리미로 눌러 투표함에 집어넣은 일명 ‘다리미표’가 발견된 것이다.

“구룡포 제1투표구에서는 ‘다리미표’(계표 시 투표용지에 풀칠을 한 다음 다리미로 눌러 재검을 해도 누구의 표인지 분별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을 말함) 삼십 매가 발견되었고, 제2투표구에서는 투표함의 봉인이 찢어져 있었고, 수십 명의 깡패가 개표소에서 활개를 치고 투표 때엔 도처에서 부정이 탄로됐다고 하니…”(경향신문 1958.9.21.)

1958년 국회의원 선거는 자유당 대 민주당의 양당구도로 치러진 첫 번째 선거였다. 당시 대통령은 자유당의 이승만이었다. 4년 전 정족수 미달의 헌법개정안을 강제로 통과시킨 ‘사사오입’ 사건으로 여론의 비웃음을 받은 것에 더해, 그동안 의존해오던 미국의 원조가 끊겨 민생이 어려워지자 국민들은 자유당 정권에 점차 등을 돌리고 있었다.

게다가 2년 전 대선에선 진보당의 조봉암이 20퍼센트를 넘는 표를 획득했다. 이승만 정권은 진보당 간부들을 간첩조작 사건으로 엮어 모조리 구속해 국회의원 선거에 나오지 못하도록 막았고, 투표함에 손을 대는 부정선거까지 저지른 것이다. ‘다리미표’는 그 중 일부에 불과했다.

부정선거의 결과인지, 구룡포에선 자유당의 김익노가 당선되었다. 당시 ‘다리미표’는 부끄러운 부정선거의 상징이었다.

#가사 중 제일 중노동은 빨래와 다리미질

 

한복이 점차 사라지고 의복문화가 바뀌면서 다리미는 필수품이 됐다. 1950년대 후반으로 향할수록 다리미 사용법과 관리법을 다룬 기사가 눈에 띄게 늘어난다.

“주부들의 가사 중에 제일 중노동에 속하는 것이 빨래와 다리미질이다. 매일 같이 땀에 젖은 와이샤스와 부라우스를 빨아 다려내기란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니다. 그것도 마루나 방바닥에 담요 정도를 깔아놓고 앉아서 다리는 것이다. 앉아서 다리는 것은 서서 다리는 것에 비해 갑절이나 힘이 드는 데 비해 적당한 높이의 다리미 대를 이용하면 노력과 시간이 절약돼 (후략)”(동아일보 1959.7.23..)

“다리미 바닥에 풀이 묻었을 때는 종이를 펼친 위에 소금을 고루 뿌린 후 그 위에 뜨겁게 한 다리미를 문지르면 기분 좋게 떨어진다”(경향신문 1960.6.3.)

“전등선에 두세 가닥이 난 소케트를 꽂고 전구 이외에 다리미나 전열을 규정 이상으로 사용하는 일이 있는데 이 방법은 절대로 삼가야 한다. 이런 때에 소케트를 만져 보면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뜨겁다”(동아일보 1960. 9.20.)

일반 가정에서는 다림질 하는 노동을 여성이 전담해야 했지만, 시장에는 기성복 상점과 구제품 의류상, 수선업을 하는 사람을 상대로 다림질을 해주는 업종까지 등장했다. 오로지 다리미 하나로 하는 사업 치고는 수입도 짭짤했다고 한다.

#엄마의 손목과 바꾼 나의 칼 주름 교복

엄마가 만난 세 번째 다리미는 1981년 아빠가 해외에서 사온 일제 다리미다. 요즘 보는 다리미와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무게가 꽤 나간다. 뭐든 직접 해보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초등학교 때 언니의 교복을 다리던 엄마를 졸라 난생 처음 다림질을 해봤다. 다리미가 무거운 데다 잠시 머뭇거릴라치면 “옷 탄다”며 성화를 내는 엄마의 목소리 때문에 진땀을 뻘뻘 흘렸던 생각이 난다. 결국 1분도 안 돼 다리미는 엄마의 손으로 넘어갔다.

엄마는 이 무거운 다리미로 나의 중ㆍ고생 시절 교복을 매주 빨고 다렸다. 한 여름에도 뜨거운 다리미를 들었다 놨다 했던 엄마의 노고 덕분에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제일 단정한 교복을 입고 다녔다. 내 인생에서 아마 가장 깔끔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내가 잘 다려진 교복 블라우스의 손목 단추를 채울 때마다 엄마의 손목은 점점 약해져갔을 거란 걸 이제야 이해한다.

요즘은 굳이 다림질해야 할 옷을 많이 입지 않을뿐더러 그런 옷은 아예 세탁소에 맡기는 것이 대부분이다. 귀차니즘으로 똘똘 뭉친 내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어찌나 다행스러운지. 사실 다림질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웬만한 내공으론 제대로 칼 주름을 잡기 힘들다. 애초에 너도나도 다 같이 다림질하지 않은 채 편하게 옷을 입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무심코 행하고 있는 노동도, 혹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지는 않는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인지, 한 번쯤 살펴보는 게 좋겠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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