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의 일이다. 동네에 작은도서관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오전 시간에 책 대출과 반납을 처리하는 자원봉사를 했다.

그 도서관 옆에는 초등학생 방과 후 활동을 돕는 지역아동센터가 있었다. 지역아동센터와 도서관은 현관을 함께 사용했고 출입구만 달랐다. 어느 한 곳에서 마이크를 사용하거나 음악을 크게 틀면 다른 곳까지 그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그래서 아이들이 지역아동센터에 오는 오후가 되면 조용한 도서관에도 활기가 돌았다.

봄비가 내리던 3월이었다. 궂은 날씨 때문인지 오전 내내 도서관엔 사람이 없었다. 심심하기도 하고 배도 고파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으려는데 밖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우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지역아동센터 앞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며칠 전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여자아이였다. 우산을 제대로 쓰지 못했는지 앞머리와 가방이 젖어 있었다.

▲ ©심혜진

“무슨 일이야? 왜 울고 있니” “문이 잠겼어요” 담당 교사에게 전화하니 점심을 먹으러 이제 막 나간 참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지역아동센터로 오기 마련인데 그날 무슨 일인지 그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급식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담당 교사는 평소대로 문을 잠그고 식사를 하러 간 것이었다. 나는 비밀번호를 눌러 아이와 지역아동센터에 들어갔다.

이 아이의 점심을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아이가 책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우리 둘은 같이 도시락을 먹기로 했다.

아이는 입을 오물거리며 밥과 반찬을 야무지게 씹었다. 각자 싸온 도시락을 먹는 것뿐인데도 나는 아이에게 뭔가 대단한 일을 해주고 있는 양 뿌듯했다. 그 애가 너무나 맛있게 먹었기 때문일까. 자꾸 그 애가 싸온 반찬에 눈길이 갔다. 브로콜리를 강낭콩과 함께 걸쭉한 소스에 조린 것이었다. 색깔로 봐선 아마도 카레가루를 넣은 듯했다.

카레소스와 브로콜리, 강낭콩은 생각해보지 못한 조합이었다. 어떤 맛일지 상상할수록 맛이 궁금했다. 하지만 반찬은 아이가 먹기에도 빠듯한 양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시래기를 넣고 주먹밥을 만들어 온 터라 아이와 나눠먹을 반찬도 없었다.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딱 한 개만 먹어보기로 했다. “맛있게 먹네. 내가 맛봐도 될까?” 아이는 아주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브로콜리 하나를 입에 넣었다. 짭조름한 간장맛과 카레향이 브로콜리에 촉촉하게 배어들어 있었다. 브로콜리 특유의 씁쓸한 맛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브로콜리는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게 놀라웠다.

강낭콩 맛도 궁금했다. 아이의 반찬은 아무래도 밥에 비해 부족해 보였다. 아이의 반찬을 자꾸 빼앗아 먹는 건 어른으로서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안에 남은 카레향의 여운은 진했다. 나는 이번엔 묻지도 않고 강낭콩을 집었다. 부드럽게 잘 익은 콩과 카레소스는 훌륭하게 어울렸다. 채소반찬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날 집에 오는 길에 브로콜리 한 송이와 생 강낭콩, 카레가루를 샀다. 브로콜리를 데쳐 건져놓고 물에 간장, 카레가루, 올리고당을 섞어 끓이다가 생 강낭콩을 넣어 푹 익혔다. 콩이 완전히 익고 소스가 걸쭉해졌을 때 데친 브로콜리를 넣어 휘휘 섞었다. 마지막으로 통깨를 뿌렸다.
아까 먹은 것과 비슷한 맛이 났다. 새로운 레시피를 얻어 기분이 좋았다. 한편으론 아이가 남긴 두어 숟가락의 밥이 자꾸 맘에 걸렸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그 아이는 중학생이 된 지 오래다. 사람의 식욕은, 아니 나의 식탐은 어디까지일까 가늠해보지만 새로운 레시피의 수만큼이나 멀리 뻗어나간 듯 끝이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넓고, 먹고 싶은 건 많다. 그래도 아이 반찬엔 손대지 말지어다. 제발.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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