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한 턱 쏠 일이 생겼다. 내가 치킨을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남편은 회를 좋아한다. 오랜만에 소래포구에서 회를 먹기로 했다. 수조에서 아가미를 여닫고 있는 물고기를 볼 때면 위선인지 죄책감인지, 하여간 물고기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남편이 고른 광어 한 마리가 생명의 기운이 사라진 하얀 살점으로 바뀌어 접시에 올라왔다. “회 먹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인간이 좀 잔인한 것 같아” 남편이 대답했다. “괜찮아. 물고기는 아픔을 모른대” 남편은 무념무상의 표정으로 회 먹는 데 열중했다.

나도 들은 적이 있다. 낙지나 오징어는 고통을 모른다고, 칼로 잘린 낙지 다리가 이에 쩍쩍 달라붙는 건 아파서 꿈틀대는 게 아니라 그저 반사작용일 뿐이라는 거다. 정말 그럴까.

 

사실 물고기가 고통을 느끼느냐 아니냐는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거리였다. 먼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쪽에선 물고기의 뇌에 신피질이 없다는 것을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신피질은 뇌의 가장 바깥쪽 주름진 부분으로 전두엽, 측두엽, 후두엽, 편두엽으로 나뉜다. 본능이 아닌, 학습으로 경험한 것을 기억하고 판단하고 저장하는 일은 모두 신피질에서 이뤄진다. 인간의 ‘의식’은 신피질의 작용이다. 만일 신피질이 없다면 의식도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인간과 물고기의 뇌를 일대 일로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새도 신피질이 없지만 새는 의식적인 행동을 한다. 도구를 만들고, 수천 개의 물체가 파묻힌 장소를 기억하고, 색깔에 따라 사물들을 나눌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심지어 장난도 친다. 따라서 신피질로 고통의 유무를 파악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야기한다.

물고기는 머리가 나쁘다고. 물고기가 너무 작거나 먹기에 적당치 않아 놓아주면 잠시 후 다시 낚싯밥을 문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3초 기억력’이라며 놀리기도 한다.

이 역시, 잘못된 판단이다. ‘물고기는 알고 있다’(조너선 밸컴 지음, 양병찬 옮김, 에이도스 펴냄)에는 어부들 사이에서는 ‘3초 기억력’이 아니라 오히려 물고기에게 ‘갈고리 기피증’이 있다는 말이 떠돈다는 내용이 나온다. 몇몇 연구에 의하면, 낚싯바늘과 낚싯줄에 걸려든 물고기가 정상 활동을 회복하는 데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다는 게 밝혀졌다. ‘잉어와 강꼬치고기의 경우, 단 한 번 낚였을 뿐인데도 최대 3년 동안 미끼를 회피했다는 일화도 있다. 큰입배스는 (중략) 6개월 동안 갈고리 기피증을 유지한다고 한다’(106쪽)

그렇다면 같은 미끼를 다시 무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위 책의 저자는 아마도 몹시 굶주렸기 때문일 거라 추측한다. 강력한 식욕이 통증의 트라우마를 압도하기 때문이란다.

좀 더 직접적인 연구도 있다. 송어의 입에 벌의 독과 식초를 주입하거나 송어를 바늘로 찌른 후 아가미의 개폐 횟수를 측정했다. 모든 송어들이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벌독과 식초를 주입한 송어가 아가미를 여닫는 횟수는 거의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세 시간이 넘도록 먹이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에게 진통제인 모르핀을 투여하자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모르핀이 송어에게 진통제로 작용한 것이다. 물고기는 사람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기 때문에 자극에 대한 반응도,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도 다르다.

공기 안에 갇혀 사는 육상생물 중엔 소리로 감정과 의사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공기는 소리를 잘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속에 사는 생물들은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소리를 내는 데 소모하는 에너지에 비해 물속에선 소리가 잘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물고기의 머리나 꼬리지느러미를 잘랐을 때 ‘으악’이나 ‘꽥’하는 소리가 난다면, 아니 눈이라도 깜빡한다면, 물고기들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착각을 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에휴, 그렇다고 내가 앞으로 영원히 물고기를 안 먹을 것도 아닌데, 이럴 땐 모르는 게 약이란 생각도 한다. 무념무상으로 살점을 씹는 남편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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