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길 위의 독서 | 전성원 | 뜨란 | 2018.01.

 

대학에 합격하고 3개월을 골방에 틀어박혀 밤낮을 바꿔가며 책을 미친 듯이 읽었다. 아마 내 생애 책을 가장 많이 읽은 때였을 거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는데,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이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 등이 기억난다. 지금은 극우보수논객으로 바뀐 김동길의 책도 몇 권 읽었는데, 제목은 가물가물하다.

시간 투자 대비 만족도가 가장 높은 책이 있었다. 월간 <신동아>에서 1968년 1월호 별책 부록으로 펴낸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이다. 당시 한국 각계 전문가들이 세계의 사상ㆍ역사ㆍ사회ㆍ문학ㆍ예술분야에서 100권을 선정해 간단하게 소개한 책이었다. 읽어야할 책을 안내해주는 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더 고마운 것은 굳이 책을 구입해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더라도 어떤 내용의 책이라는 정도는 알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사람들과 얘기할 때 아는 척 좀 할 수 있겠다는 얄팍한 계산까지 깔렸으니 얼마나 고마운 책이랴. 실제 대학생활 동안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으니 시간 투자 대비 최고의 책이 틀림없다. 아! 부끄러운 청춘이여. 사회생활 하면서도 가끔 그런 책을 읽곤 했다. 지금은 읽지 않는다. 나름 독서의 목적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가며 천박해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독서하는데 굳이 읽어야할 책 목록이 필요할까?

책에 관한 책을 썼는데, 새로운 질의 책으로 탄생한 책이 있다. 지은이에게 책은 삶의 전부였다. 위태로운 삶의 탈출구였으며 피난처였다. 책 읽고 글을 썼는데, 글은 읽은 책을 넘어 그가 겪은 삶과 섞이고 반추돼 새로운 글이 되고 새 세상이 됐다. 새롭게 태어난 글들을 모아 책을 냈는데, 책은 작은 도서관이 됐다. 예쁜 그림책이 꽂혀 있다. 묵직한 철학책과 심각한 역사책이 어깨동무하고 있다. 삶을 아프게 엮은 문학도 있다. 그러나 작은 도서관의 주인은 책이 아니라 아프고 고달픈 삶이다.

도서관을 만든 이는 묻는다. 도대체 삶은 무엇이며, 세상은 왜 요 모양 요 꼴이냐. 답을 찾아 길을 나선다. 세상을 주유(周遊)하면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역마는 젊은 날의 꿈이다. 그러나 삶은 더 이상 탈주를 허락하지 않는다. 인간은 관계의 경계를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경계 탈출을 쉽게 포기할 수도 없다.

다시 길을 찾아 나선다. 책 속으로 유목한다. 길은 사통팔달로 뻗어 있지 않다. 오히려 사방팔방이 길인 듯하다. 책의 초원엔 철자가 기호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다. 초원은 답을 줄 수 있을까? 저자에게 책은 괴로운 기억이고, 불의한 세상이며, 작은 희망이자 사랑이다. 괴롭게 헤매며 쓴 글은 숲이 되고, 작은 도서관이 됐다. ‘길 위의 독서’가 됐다. 그가 걸었던 책 숲을 지나고 나면, 그가 사랑했던 나무와 숲이 조금 보인다. 삶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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