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3월 어느 날이었다. 이제 막 경상도에서 인천으로 이사를 온 터였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학교에 가야했지만 아직 전학 갈 곳이 배정되지 않아 교육청에서 연락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집엔 엄마와 나만 있었다. 새벽부터 언니와 남동생의 도시락을 싸고 아침상을 차려주고 설거지까지 마친 엄마는 방에 들어가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엄마가 그 시간에 눕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점심때가 지나서도 엄마는 일어날 줄을 몰랐다. 가느다란 목소리로 엄마가 나를 불렀다.

“아파서 못 일어나겠다. 혼자 밥 차려 먹을 수 있겠어?” “엄마는요?” “나는 안 먹고 싶어”

▲ ⓒ심혜진.
몸살이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나는 혼자 밥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 오후가 되도 엄마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가족들이 감기에 걸리면 엄마는 먹고 싶다는 것을 해주곤 했다. 아직 어렸던 나는 엄마에게 무엇을 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며칠 전 아침방송에서 아플 땐 죽이나 스프처럼 부드러운 것을 먹는 것이 좋다는 얘길 들은 게 생각났다. 나는 쇠고기스프를 사왔다.

스프는 집에서 한 번도 먹어보지도, 끓여보지도 않았다. 포장지에 조리법이 쓰여 있는 줄도 몰랐다. 스프 가루는 생각보다 양이 너무 적었다. 조그만 냄비에 물을 붓고 가루를 모두 쏟아 넣었다. 뚜껑을 닫고 싱크대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냄비 뚜껑이 들썩거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스프가 끓어 넘쳤다.

스프 국물이 전자레인지를 넘어 바닥까지 줄줄 흘렀다. 뚜껑을 열었지만 스프는 계속 냄비 밖으로 기어 나왔다. 나는 그제야 급히 가스 불을 껐다. 스프 가루는 결코 양이 적은 게 아니었다. 냄비가 작았던 것이다.

스프로 흥건한 가스레인지와 바닥을 닦고 또 닦았다. 가스레인지 구석구석에 스민 스프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고 스프의 기름기 때문에 바닥은 미끈거렸다. 사고를 친 것이 분명했다. 엄마를 도와주려던 것이 도리어 번거롭게 만든 것 같아 속이 상했다.

냄비 속 스프는 절반이나 줄어 있었다. 물을 조금 더 붓고 다시 가스 불을 켜기 위해 손잡이를 돌렸다. 불이 켜지지 않았다. 몇 번을 해봐도 같았다. 가스레인지까지 망가트리다니, 진땀이 났다. 우선 다른 쪽 가스 불에 냄비를 올렸다. 국그릇에 스프를 담아 엄마에게 가져가면서,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쟁반에 담긴 스프를 본 엄마는 깜짝 놀란 듯했다. “아이고… 엄마 아프다고 끓였어? 이런 걸 어떻게 할 줄 알고” “…” “맛있네, 참 맛있어”

엄마는 몇 번이나 맛있다고 말하며 해쓱한 얼굴로 웃었다. 엄마는 스프를 바닥까지 싹 비웠다. 정말 맛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내 정성을 생각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맛있게 드신 건 다행이었지만, 내가 사고 친 걸 알면 얼마나 속상해할까 하는 생각에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그날 저녁, 엄마는 몸을 일으켜 저녁상을 차렸다. 설거지도 했다. 걱정했던 가스레인지는 멀쩡히 국을 데웠다. 물기 때문에 잠시 불이 붙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엄마는 일찍 잠이 드셨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엄마가 말했다. 어렸을 때 이후로 아플 때 누가 음식을 차려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엄마는 오랫동안 그 일을 되새겼다. 다시 그런 일이 있었던가? 아… 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