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인천축항공사도보(仁川築港工事圖譜)’라는 사진집이 있다. 1919년 3월 31일 조선총독관방토목국 인천출장소에서 보관 중인 사진을 모아 발간한 책이다. 제목 그대로 인천항의 축조, 즉 갑문(閘門)을 갖춘 공사의 전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 사진집을 보면, 1911년 6월 11일에 기공식을, 1918년 11월 27일에 준공식을 개최했다. 1918년 8월 5일 설치한 갑문 안으로 물을 넣는 통수식(通水式)을 했고, 같은 해 10월 26일에는 ‘타카사고마루(高砂丸)’라는 배가 갑문으로 들어왔다. 준공식에는 공사의 안전을 기원하는 ‘진호(鎭護)’라 쓰인 조선총독부 명의의 기석(基石)을 바다에 던지는 침전(沈奠) 행사도 일본 신도(神道) 사제 주관으로 열렸다. 배 위에 만든 걸로 보이는 기공식장에는 색색의 깃발을 늘어뜨린 줄에 매달았고 맨 위에는 대형 일장기를 세 개나 걸었다.

얼마 전 보도로 인천항 갑문 축조 100주년 행사가 무산될 위기라는 걸 알았고, 이에 대한 비판도 접했다. 기사를 보면, 인천시 담당 부서에서 갑문 축조 100주년 기념식을 계획했으나, 시 보조금심의위원회의 ‘부적정’ 판단으로 행사 예산을 편성하지 못했다. 속사정을 모르면서 단언하기 어렵지만, 기념식이 ‘부적정’하다는 판단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그들의 필요에 의해 계획하고 실행한 시설이나 일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아닐까 한다.

세상 모든 일에 명암(明暗)이 있고, 화복(禍福)은 함께 온다는 말처럼, 개항으로 근대문물을 받아들인 인천은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 최초(最初), 최고(最古)라는 자랑 뒤에는 타의에 의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굴곡진 역사가 녹아있다. 두 측면을 어떻게 조화시켜 지혜롭게 바라보는지가 인천이란 도시의 사관(史觀)으로 연결된다. 어쩌면 갑문 축조 100주년은 하나의 예일지 모른다. 앞으로 2045년까지 100년을 맞게 되는 일제강점기의 일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논리가 있다. 일제가 계획하고 시행한 많은 조치들이 조선을 근대로 이끌었다는 논리다. 학교가 늘어 초등교육 이수생이 급증했다든가, 계속된 철도 건설로 편리해졌다든가, 곡물 생산량이 늘어 농업생산력 증대를 이뤘다든가 하는 것이다.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해 항만이 될 수 없었던 인천항이 오늘의 역사를 일궈낸 데 시발점이 되는 역할을 했다’라거나 ‘동양 최초’라는 갑문에 대한 평가는 행위 주체의 목적과 의도는 사라지고 시설이라는 껍데기만 본 것이라는 오해를 살수도 있다.

축항 공사 강제노역에 동원된 김구 선생을 거론한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현재의 갑문은 독재정권 시기라는 비판을 받지만 1974년에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이다.

인천항 갑문이 인천에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갑문 축조를 둘러싼 시대 조건의 의미와 거기에 얽힌 이야기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있다. ‘기념’할 것인가? ‘기억’할 것인가? 근현대사의 애환이 켜켜이 쌓인 인천이니만큼 다른 도시보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 더 신경 써야 한다. 기념과 기억의 대상은 사람인지, 시설인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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