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침기온이 영하 15도까지 내려갔다. 전기난로를 집안 여기저기 끌고 다니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보일러를 돌렸다. 한 시간도 안 돼 집안이 훈훈해졌다. ‘이렇게 따뜻한데 진작 틀 걸’ 혼잣말을 하다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가 사는 집은 서향집이라 오후가 돼야 집 안에 겨우 햇빛이 든다. 초겨울부터 온 집 안에 냉기가 돌기 시작해 1월엔 그야말로 냉골이 된다. 그런데도 엄마는 여간해선 보일러를 돌리지 않는다. 좀 따뜻한 집으로 이사 가면 좋을 텐데 정이 많이 들어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하긴, 엄마가 나이 오십이 다 돼 처음 장만한 ‘내 집’이니 그럴 만하다.

“그렇게 추운 집에서 살다가 병이라도 나면 어쩌시려고…” 내가 잔소리를 하니 “그러게. 겨울에 따뜻하게 지내본 적이 별로 없네” 하신다. 어릴 때 살던 집은 주택이어서 웃풍은 심했지만 추웠던 기억은 없다. 늘 아랫목이 따끈따끈했다. 어렸을 때 살던 집은 따뜻했지 않느냐는 내 말에, 엄마가 대답했다. “너희 방만 그렇게 땐 거야. 아빠랑 나는 춥지만 않게, 미지근한 방에서 잤어”

부모님이 못 먹고 못 입는 건 눈에 빤히 보여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식들이 자는 방에만 연탄불을 활활 지펴 놓았다는 건 처음 알았다. “너희 방은 연탄불이 빨리 타니까 항상 새벽 서너 시쯤에 일어나서 불을 갈았어. 안 그러면 꺼지니까” 엄마 얘길 듣고 보니 기억이 난다. 가끔 새벽녘에 아궁이 연탄 덮개를 여닫는 쇳소리가 잠결에도 들렸다. 생각만 해도 고된 일이다. “왜 안 힘들었겠어. 그냥 힘들다는 생각을 안 한 거지.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고 여겼으니까”

# 온 산으로 땔감 구하러 다니던 시절

엄마가 겪은 난방의 역사는 땔감을 구하러 다닌 기억에서 시작한다. 엄마는 십대 때부터 여기저기로 땔감을 구하러 다녔다.

“주로 산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주웠어. 주인이 있는 산이라 나무를 베면 안 되거든. 생나무를 자르다가 주인한테 들켜서 잡혀간 사람도 있었어. 요즘엔 산에 나무가 많지만 예전엔 거의 벌거숭이였지. 전부 다 땔감으로 나무를 썼으니까. 온 산을 멀리까지 돌아다니면서 싸리나무를 베거나 솔잎을 갈퀴로 긁어서 가져왔어. 하루 종일 모으면 2~3일 땔 만큼 양이 돼. 지금 생각하면 참 억척스럽게 일했어”

1950년대까지 난방 연료로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장작과 볏짚, 건초였다. 대부분 농사를 짓던 때라 볏짚은 흔했다. 문제는 너무 금방 타버린다는 것이었다.

“나무는 주로 오빠들이 해왔어. 썩은 나무 둥치나 뿌리를 곡괭이로 캐서 쪼개서 썼지. 나는 낫으로 소나무 아래쪽 잔가지를 쳐서 가져왔고. 제일 좋은 건 소나무 옹이였어. 송진이 많아서 불쏘시개 없이 성냥으로도 바로 불이 붙고 아주 오래 타거든”

# 죽음의 신, 연탄가스

▲ 연탄.
1950년대에도 구공탄이라 불리던 연탄이 생산되고 있었다. 1959년 7월 22일자 <동아일보>에 ‘5년 전 (석탄) 88만 톤을 캐고서도 팔지 못해 안달했는데, 올해는 380만 톤을 캐고서도 수요가 부족하다’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한 해 소비하는 열량을 석탄으로 환산하면 1500만 톤 분량이었다. 이중 석탄이 차지하는 양을 제외한 1120만 톤에 해당하는 열량을 나무와 짚, 건초가 담당했다. 하지만 산림은 한 해에 150만 톤밖에 늘지 않았다. 당시 계산에 의하면 해마다 820만 톤 열량에 해당하는 생나무를 깎아 불을 때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던 것이 연탄 소비량이 점차 늘어나 1965년을 기점으로 연탄이 장작 등 초목연료 소비량을 넘어섰다.(<한겨레신문> 1995.1.12.)

엄마가 연탄을 사용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엄마는 그때를 또렷이 기억했다.

“열여섯 살 때(1965년)부터야. 이사를 갔는데 연탄아궁이가 있는 집이었지. 장작을 안 해도 돼서 좋겠다 싶었는데 가스냄새가 너무 심하게 나는 거야. 아침에 일어나다가 기절하기도 했어. 토한 것도 여러 번이고. 온 가족이 쓰러져 몇 번이나 죽을 뻔했지. 서너 달 살다가 다른 집으로 이사 갔어”

연탄가스는 골칫거리였다. 1930년대부터 연탄가스에 질식돼 숨졌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등장하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겨울철만 되면 사망 기사가 속출했다. 당시 난방은 연탄아궁이의 열기가 방바닥에 깔린 구들장 밑을 지나면서 방을 데우는 방식이었다. 흙으로 바른 구들장이 깨지고 갈라진 곳이나 벽 틈으로 여러 가지 유해물질과 일산화탄소가 새어나오는 일이 많았다. 방이나 창고, 사무실에서 연탄을 피워놓고 잠을 자다가 사망하는 일도 잦았다. 사망자 수는 점점 늘어나 1968년 한 해에 350여명이 연탄가스로 숨졌다. 1973년에는 580명으로 늘었고 1975년엔 서울에서만 850여명, 1976년엔 1013명이 사망했다.(<서울신문> 2017.4.30.)

특히 잠 잘 때 사고가 많이 난 이유는 때가 되면 갈아야 하는, 연탄의 속성이 한몫했다. 아침까지 연탄불이 꺼지지 않게 하려면 잠을 자기 직전 새 연탄을 아궁이에 넣어두어야 한다. 연탄은 불이 붙기 시작할 때 가스가 가장 많이 나온다. 게다가 연탄이 오래 타게 하기 위해선 화력을 조절하는 ‘불구멍’을 작게 열어놔야 하는데, 산소 공급이 잘 되지 않아 연탄에 제대로 불이 붙지 않으면서 일산화탄소가 다량 배출될 수 있다. 사망에 이르지 않았을 뿐, 집집마다 연탄가스를 마시는 일은 자주 일어났다. 가스 사고가 일어날까 하는 두려움은 어느덧 일상이 됐다.

# 연탄가스 중독, 식초가 살린다?

연탄가스가 ‘죽음의 신’으로 불리며 국가적인 골칫거리가 된 무렵, 한 사건이 모든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1972년 2월 22일자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매일경제> 1면에 ‘연탄가스 중독 식초요법으로 완치’라는 기사가 실렸다.

‘한양대 의대 생리학 교수 이병희 박사, 연세대 화학과 교수 이길상 박사,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분석실 수석연구관 이원 박사 등 3명은 21일 오후 한양의료원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에 관한 연구의 중간 결과를 발표, 연탄가스 중독을 포함한 일산화탄소 중독 환자에게 빙초산(식초)을 솜에 묻혀 코에 대주어 호흡시키면 호흡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는 한 회복될 수 있다는 자가치료법을 밝혔다.(중략) 연구팀은 2년 동안 토끼 등의 임상실험을 거쳐 최근 한양의료원에 입원한 응급환자 13명과 치료를 받았으나 회복이 안 된 중환자 27명에게 이 방법을 쓴 결과 완전히 깨어났다고 말했다’(<동아일보>)

연구팀은 식초가 산소를 조직으로 옮겨주는 헤모글로빈을 증가시키고 깊은 호흡을 할 수 있게 한다고 추정했다. 같은 날 <경향신문>은 가정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됐을 때 할 수 있는 ‘식초요법’을 자세히 소개했다.

어느 집에나 있는 흔해 빠진 식초가 죽음의 신을 몰아내는 기특한 치료제였다니 얼마나 반가운 소식이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역시나 반응은 뜨거웠다. 곳곳에서 식초요법으로 효과를 봤다는 제보가 속출했고, 한 연탄제조회사는 이 연구팀에 성금 200만원을 보냈다.

열흘 후인 3월 2일 <경향신문>엔 ‘서툰 식초요법 부작용 잇달아’라는 기사가 실렸다. 가스중독으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의 코에 빙초산을 부어 얼굴에 1도 화상을 입히고, 식초를 먹여 식도가 탔다는 내용이었다. 수건에 식초를 묻혀 코에 갖다 댔으나 깨어나지 않아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숨졌다는 내용도 있었다. 식초요법이 실패한 것은, 제대로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같은 해 6월 서울대학교에서 동물실험 결과 ‘식초요법이 아무런 효과가 없고 오히려 회복시간이 더디고 치료시간을 늦춰 사망에 이를 위험이 더 크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때부터 효과가 있다, 없다 하는 논쟁에 불이 붙었다. 하지만 팽팽히 맞서기만할 뿐 확실한 결론은 나지 않았다. 연탄가스를 마셔 속이 미식거릴 때 동치미국물을 마시면 속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도 이 무렵 등장했다.

사실 ‘식초요법’은 한 시민의 제보에서 나왔다. 서울시 서대문구에 살던 조아무개씨가 식초로 두 사람을 살린 일이 있었다며, 연세대 교수를 찾아가 이것을 연구해볼 것을 권한 것이다. 논란 속에도 기업들은 발 빠르게 움직여 식초요법 기구를 만들어 판매하고, 1980년 11월엔 식초와 암모니아를 이용해 연탄가스를 예방하는 ‘가스킬러’라는 상품도 시장에 나왔다.

하지만 이후로도 사망자는 크게 줄지 않았다. 사람들은 식초에 아무런 효과가 없음을 자연스레 알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식초와 연탄가스 관련 기사는 신문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 2015년 도시가스 보급률 64.6%

▲ 가스보일러.
연탄아궁이가 연탄보일러로 바뀌면서 가스 중독 사고도 줄어들었다. 연탄아궁이는 1983년 33%에서 1986년 17.4%로 떨어졌고, 대신 연탄보일러는 45.8%에서 63.4%로 크게 증가했다.(<매일경제> 1988.1.8.) 이후 기름보일러와 가스보일러가 보급되면서 연탄을 갈고 재를 버리는 일에서 해방되는 가정이 늘어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도시가스를 사용한 곳은 서울 용산구의 외국인아파트였다. 1970년 10월 도시가스사업소를 발족하고 외국인아파트에 시험 공급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반 가정에서 도시가스를 사용하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다. 1987년부터 서울시 아파트단지를 중심으로 도시가스가 공급됐고, 1989년에 환경청은 대기오염 방지를 위해 서울시 신설 아파트 중 14평 이상은 천연액화가스(LNG)나 경유를 의무적으로 사용해야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1991년엔 LNG 보급이 도청 소재지까지 확대됐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통계를 보면, 일반가구의 난방시설은 도시가스보일러(64.4%), 지역난방(12.7%), 기름보일러(12.1%), 전기보일러(3.5%), 연탄보일러(0.8%) 차례였다.

# 엄마에게 도시가스는 축복

웬만해선 난방을 하지 않는 엄마에게도 도시가스는 축복이다.

“땔거리 걱정 안 해도 되고 연탄불 안 갈아도 되니까 정말 편해. 방도 금방 따뜻해지고, 뜨거운 물도 잘 나오고 얼마나 좋아. 기름에 비하면 값도 싸잖아. 옛날에 어떻게 살았나 싶어. 너는 상상도 못할 거야”

물론 노동이 얼마나 고됐을지, 땔거리 걱정에 얼마나 막막했을지, 나도 짐작은 할 수 있다. 다만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건 엄마가 느끼는 도시가스의 가치이다. 나무를 구하기 위해 온 산을 헤매고, 때맞춰 연탄을 갈고, 씻을 물을 데워 퍼 나르던 시절을 몸으로 겪은 엄마에게 버튼만 누르면 온 집안이 따뜻해지고 수도꼭지만 열면 뜨거운 물이 줄줄 나오는 일은 결코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다. 지난한 고통을 겪은 끝에 겨우 얻은 보상 같은 것이다.

해마다 겨울이 오면 “올해는 보일러 좀 때고 살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난방을 하지 않고 있을 엄마. 이 글을 읽으면 보일러를 좀 돌리실까. 따뜻하게 사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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