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다닐 때 봉사동아리에 가입했다. 양육환경이 좋지 않은 초ㆍ중학생 아이들과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 숙제를 돕거나 같이 놀기도 하는 활동을 하는 동아리였다.

내가 만나는 아이는 중학교 2학년, 삐쩍 마른 진희(가명)라는 여자아이였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 집을 나갔고 같이 살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몇 년 전 사망했다. 돌봐줄 친척이 없어 동네 한 아저씨가 후견인 역할을 자처했지만 진희는 그에게 별다른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단칸방에서 혼자 살았다.

진희의 집은 또래 아이들의 아지트나 마찬가지였다. ‘대학생 언니들’이 그의 집에 처음 갔을 때 집안엔 담배꽁초와 술병, 과자봉지 같은 쓰레기가 가득했고 가스레인지엔 얼룩 더께가 덕지덕지 눌어붙어 있었다. 진희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지만 매주 약속한 시간에 우리가 찾아가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한 달 쯤 지나 진희와 조금 가까워졌을 때, 나와 친구는 진희를 설득해 함께 청소하고 가스레인지를 닦았다. 처음엔 못마땅해 하던 진희도 깨끗해진 집 안을 보더니 기분이 좋은 듯 살짝 웃었다.

▲ ⓒ심혜진.
그날도 진희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진희는 문을 열어주는가 싶더니 곧장 책상 앞으로 가 앉았다. 숙제하는 중이라고 했다. 방 한 쪽의 오래된 전기밥솥에선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너무 달라진 진희 모습에 많이 놀랐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책상에 앉은 지 5분도 되지 않아 진희가 배가 고프다며 밥을 먹자고 했다.

반찬은 구이김과 시장에서 산 김치가 전부였다. 진희는 그날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오래된 쌀로 밥을 했는지 군내가 많이 났지만, 따뜻하고 사랑스럽던 그 밥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다음 주는 새해였다. 약속한 시간 진희네 집으로 가는 길, 문득 지난주에 밥을 맛있게 먹던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엄마가 끓여준 떡만둣국을 먹었지만 진희에겐 떡국을 끓여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난 주 식사 대접을 받았으니 이번엔 내가 떡만둣국을 끓여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문을 연 가게가 없어 떡을 사느라 애를 먹었다. 슈퍼마켓에서 물만두와 계란도 샀다. 진희에게 떡만둣국을 끓여주겠노라 호언장담하며 가스레인지 앞에 섰다.

물을 붓고 떡과 만두를 넣었다. 마지막에 계란을 풀어 넣었더니 모양이 그럴싸했다. 소금을 넣고 국물을 한 숟갈 입안에 떠 넣었는데 이걸 어쩌나. 국물에서 짠맛밖에 나지 않았다. 너무 맛이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파를 넣어야 하나? 냉장고를 열어봐도 넣을 만 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간장이라도 있어야 만두를 찍어먹을 텐데….

보기에만 그럴듯한 떡만둣국을 두 그릇 담았다. 진희는 콧노래를 부르며 상으로 바싹 다가왔다. “처음으로 끓인 거야. 성의를 생각해서 먹어줘” 진희는 떡을 입에 넣더니 살짝 인상을 썼다. “맛이 왜 이래” “맛이 없지… 미안해” 진희는 별 말 없이 한 그릇을 싹 비웠다.

그날 저녁 집에 와서야 알았다. 소고기나 멸치로 육수를 내거나 조미료라도 넣어야했다는 걸. 새해 첫날부터 맛없는 떡국을 먹게 하다니. 진희에게 너무 미안했다.

진희는 그해 내내 학교와 동네에서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켰다. 며칠 무단결석을 한 뒤 학교에 못 가겠다는 진희를 설득해 교실까지 함께 가기도 했고, 싸움을 하다가 잡혀간 진희를 훈방시키느라 난생 처음 파출소도 가봤다. 원조교제 이야기도 들렸다. 진희의 핸드폰 번호는 수시로 바뀌어 연락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약속한 시간에 만나지 못하는 일도 잦았다. 진희에겐 생활을 함께 하는 또래집단의 규율이 나와의 약속보다 더 중요할 거라고 이해했다. 학생이었던 나는 그 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진희를 생각할수록 무기력해졌다. 나는 취업준비에 몰두했다. 가끔 낯선 번호로 장난스러운 문자가 왔다. 나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것이 진희였을 수도 있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았다.

그해 겨울 진희는 어렸을 때 헤어진 엄마를 찾아 강원도로 갔다. 이듬해 진희에게 걸려온 전화에 내가 취직 소식을 알렸고, 진희는 축하해줬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가끔 진희를 생각한다. 서른을 훌쩍 넘긴 진희는 어떤 모습일까. 언젠가 소설이나 영화처럼, 진희를 마주치는 상상을 해본다. 진희에게 맛있는 떡국 한 그릇 꼭 대접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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