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생 전쟁둥이인 이입분(68)씨는 두레박으로 퍼 올린 우물물부터 프랑스 산 ‘에비앙’ 생수까지 모두 맛본 세대다. 그가 온몸으로 통과한 현대생활사를 물건으로 되짚어보려 한다. 이입분씨는 내 엄마다.

4년 전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친구가 선물로 전기압력밥솥을 사주겠다고 했다. 5~6인용으로 할지, 10인용으로 할지 정해서 알려 달란다. 생각할 것도 없이 “5인용”이라고 말했다. 마침 엄마가 우리 통화를 옆에서 듣고 있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내게 “밥솥은 무조건 커야한다”며 10인용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고 했다. 손님이 왔을 때 밥솥이 작으면 밥을 두 번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 그런가?” 나는 친구에게 10인용으로 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난 잘못된 선택을 했다. 그동안 10인분의 밥을 할 일이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밥솥을 볼 때마다 커다란 덩치가 부담스러웠다. 엄마는 왜 10인용으로 사라고 했을까, 평소엔 고집 센 내가 그때는 왜 그리 귀가 얇았을까, 후회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다섯 식구의 아침ㆍ저녁 밥상에 늘 따뜻한 밥을 올렸다. 어느덧 1인 가구의 홀몸노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10인용 밥솥을 쓴다.

아마도 엄마에겐 다섯 식구의 살림을 도맡아하던 그 시절 계량법이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다. 하루 두 끼 먹는 나에게 ‘10인분’은 5일에서 일주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인데, 여전히 ‘다섯 식구 계량법’으로 셈하고 있는 엄마에겐 고작 밥상 두 번 차리면 끝나는 양이다.

밥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을 떠올려보면, 양은냄비 바닥에서 축축한 누룽지를 떼어 먹었던 일, 딱 한 번 곤로에 올려놓은 밥이 타 좁은 부엌이 연기로 가득 찼던 일이 생각난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언니가 무슨 발표회를 하던 날 엄마와 함께 그곳에 갔다. 예상보다 행사가 길어졌는지 엄마가 “너 얼른 집에 가서 전기밥솥 취사버튼을 눌러라”라며 나를 집으로 보냈다.

집으로 달려와 전기밥솥 앞에 섰는데, 그 순간 엄마가 누르라고 한 것이 하얀색인지, 검은색인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모두 다 눌러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얀 버튼은 취사버튼이고, 검은 것은 냄비 뚜껑이 들썩이지 않게 고정하는 손잡이 같은 것이었다. 그때가 1985년이었으니 그 무렵 우리 집 밥은 전기밥솥이 담당했다.

처음 전기밥솥이 나왔을 때 어땠는지 엄마에게 물었다. “냄비에 밥을 하면 끓어 넘치는지 봐야 하고 시간 맞춰서 불을 줄여야 하잖아. 깜빡 하면 태울 수도 있고. 아주 신경이 쓰여. 전기밥솥은 쌀 씻어서 앉혀만 놓으면 신경 안 써도 되고 또 보온까지 되니까 좋았지. 밥맛은 좀 덜해도 쓸 수밖에 없었어”

# ‘밭에 나가 할 일이 많은데 게을러질 틈이라도 있겠어요’

 
우리나라에서 전기밥솥은 1965년 금성에서 처음 만들었다. 이듬해 1월 4일 <동아일보>엔 전기밥솥ㆍ전기곤로ㆍ시계ㆍ라디오ㆍ전기냉장고가 산타와 함께 그려진 ‘금성전기기구’ 광고가 실렸다. 첫 출시된 전기밥솥은 오래가지 못했다. 1969년 12월 4일 <매일경제>엔 ‘얼마 전 금성사에서 1대당 5500원에 생산한 바 있으나 요즘은 생산이 중단됐고 현재 일제 히다찌ㆍ내셔널ㆍ산요 제품만이 등장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 따르면, 당시 일제 전기밥솥은 스위치를 올리면 20분 만에 밥이 되고, 이후엔 전기가 꺼져 보온은 되지 않았다. 한 번에 4~5인분의 밥을 지을 수 있고 가격은 대당 1만 5000원이었다. 1970년 대기업 사원의 월급이 2만원, 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2만 5000원 정도였으니 전기밥솥은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아주 비싼 물건이었다.

1974년 12월 4일 기사엔 서민을 울린 ‘밥솥사기단’이 등장했다. 경기도 파주에 사는 윤씨에게 ‘남자 외판원 2명이 나타나 전기밥솥 1개에 1만 8000원, 보온밥통 1개에 2만 8000원인데 두 가지를 모두 살 경우 2만원에 주겠다고 꾀어 엄청나게 싼 값으로 사는 것인 줄 알고 구입’했으나 알고 보니 사기였다는 내용이다. 밥솥을 만든 업체도 무허가였다는 걸 알고서 윤씨는 그만 며칠째 몸져눕기까지 했단다.

전기밥솥은 서서히 서민들 가정에도 보급돼 금성사에서는 1976년 다시 전기밥솥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농촌에서도 전기밥솥은 당연히 환영받아 1977년엔 농촌의 다섯 집 중 한 곳에서 전기밥솥을 사용했다. 그해 7월 7일 <경향신문>엔 ‘단추 하나만 누르면 쌀이 적당히 익고 보온까지 되는 전기밥솥과 밥통은 농가부엌에 있어서 취사 방법의 혁명적인 존재로 여겨진다’는 내용이 실렸다. 이 기사엔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충남에 사는 한 주부는 ‘지난해 가을 집안 식구 모르게 쌀 다섯 말을 퍼주고 전기밥솥을 샀다가 시부모에게 발각돼 쫓겨날 뻔’했고, ‘솥을 닦는다고 통째로 물속에 집어넣었다가 전기부품에까지 물이 들어가 써보지도 못한 채 버리기도 일쑤’라는 안타까운 사연도 실렸다.

농가에서 전기밥솥을 반기는 이유는 밥 지을 때 사용하는 연료인 볏짚보다 전기세가 저렴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기밥솥 사용으로 주부들이 게을러지는 거 아니냐는 의구심 어린 눈빛에 한 촌부는 똑 부러진 대답을 한다. ‘밭에 나가 할 일이 많은데 게을러질 틈이라도 있겠어요’

# ‘복부인’에 이어 ‘전기밥솥부인’?

저절로 밥이 되는 이 기특한 밥솥이 한편으론 잦은 고장으로 꽤나 속을 썩였다. ‘전기밥솥 밥타기 일쑤’(동아일보 1975.3.11.), ‘고발-불량 전기밥솥’(경향신문 1976.1.14.), ‘국산 전기밥솥 고발, 23%가 밥 탄다 불만’(동아일보 1983.2.19.), ‘밥 지어지지 않는 전기밥솥’(경향신문 1984.7.16.), ‘세 번 고친 전기밥솥 또 고장’(경향신문 1985.3.18.), ‘전기밥솥 밥 타고 누렇게 변색’(경향신문 1985.5.6.) 등 고장 기사가 끝도 없이 쏟아졌다. 특히 고장은 국산 전기밥솥에서 훨씬 많이 발생했다.

밥이 타는 것은 식구들에게 제 때 밥을 못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주부 입장에선 이만저만 큰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더 좋은 물건이 필요했다. 일본에서 만든 ‘코끼리표 전기밥솥’(조지루시)이 물망에 올랐다. 밥이 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밥통에 밥을 넣어 놓은 지 3일이 지나도 군내가 나지 않는다니, 하루만 지나도 누렇게 말라버리는 국산 밥통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80년대 초반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 손엔 코끼리표 밥통이 한 개씩 들려있었다고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1983년 2월, 사건이 터졌다. 전국주부교실 부산지부 회원 17명이 일본 여행을 다녀오면서 많은 양의 일본 상품을 사들여왔다는 소식이 보도돼,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이들이 사온 것은 밍크목도리와 전기밥솥, 진공청소기, 카메라, 전기약탕기 등 모두 690만원 어치였다. 사실 이 일은 일본 <아사히신문>에 ‘한국 주부들이 시모노세키에서 일제 상품을 산더미같이 사갔다’는 내용이 보도되면서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이다.

적발된 이들은 하나같이 ‘대부분의 해외여행자들이 갖고 오는 수준 이상의 물품을 갖고 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해외여행이 흔치 않고 국산 전자제품 성능이 시원찮던 시절, 해외에 나갔다 들어오는 이들은 남녀 불문하고 본인이 사용할 물건을 비롯해 친척과 이웃이 부탁한 다리미나 라디오, 텔레비전 등 전자제품들을 잔뜩 사들여오는 일이 아주 흔했다.

그럼에도 이 일은 두고두고 회자됐다. 1983년 2월 11일 <매일경제>엔 ‘복부인에 이어 이번엔 전기밥솥부인’이라며 ‘재 교육시켜야겠다’는 기사가 실렸다. 비난의 수위는 높아져 이들의 명단을 공개해야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결국 여행회사 직원 두 명이 외환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되고, 여행자 한 명이 입건됐다. 이후 정부는 내국인 여행자의 휴대품 반입 규제를 대폭 강화했다.

일본산 전기밥솥은 반입이 금지됐고, 세금을 내지 않고 들여올 수 있는 휴대품은 술 한 병, 담배 열 갑, 향수 한 병, 이외에 해외 취득 가격 10만원 이내의 물품 정도였다. 관세청이 정한 20여 가지 반입 금지 품목에는 컬러TV, 전자게임기, 무선전화기가 들어 있었다. ‘여행자용품으로 볼 수 없는 품목은 세관으로 넘긴다’는 조항을 넣어 전기밥솥과 전축, 텔레비전 등은 한 점만 가지고 오더라도 세금을 내게 했다. 사건이 벌어진 직후인 1983년 4월 25일 <경향신문>엔 ‘국내 전기밥솥의 판매량 58% 증가’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전기밥솥에 대한 불만은 이후로 한동안 이어지다 1989년 2월에 ‘국산 전기밥솥 안전도 높아’<한겨레신문>와 1990년 12월 ‘전기밥솥 품질 일제와 대등’<한겨레신문> 기사가 실렸다. 전기밥솥의 품질도 안정기에 들어섰다.

# IMF 딛고 일어선 ‘쿠쿠’ 1년 만에 업계 1위

1980년대 중반엔 압력솥이 개발됐다. 사람들은 옛날 가마솥 밥맛이 돌아왔다며 압력솥을 반겼다. 게다가 밥하는 시간도 절반이나 단축돼 고가의 압력솥을 사용하는 이들이 늘었다. 1993년 8월 29일 <한겨레신문> 기사를 보면, 서울ㆍ경기지역 여성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밥솥 사용 실태 조사에서 전기밥솥을 사용하는 가구가 62.3%, 압력밥솥 32.7%, 일반 솥이나 냄비 5.1%를 각각 차지하는 것으로 나왔다.

압력밥솥에 밀릴 세라 전기밥솥은 점점 진화했다. 예약기능이 더해졌고, 밥 이외에 죽이나 갈비찜 등 다른 요리를 할 수 있는 기능도 추가됐다. 1990년대 중반엔 전기압력밥솥이 출시됐다. 1997년 찾아온 IMF 외환위기도 밥솥시장 만큼은 피해갔다. 1998년 홈쇼핑에서 전기압력밥솥이 3개월 동안 1만 500개 팔려 전체 상품 중 1위를 차지했다.(경향신문 1998.5.2) IMF 여파로 외식 대신 집에서 밥을 먹는 일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성광전자의 활약이 가장 눈에 띈다. 성광전자는 자체 브랜드 없이 주문자생산방식으로 제품을 판매하던 기업이었다. IMF 여파로 납품물량이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자 해결방법으로 1994년부터 준비해온 독자 상표 ‘쿠쿠(CUKOO)’를 1998년 시장에 내놓았다. 세련된 디자인과 좋은 품질을 인정받아 이듬해에만 무려 40만대를 판매하며 시장점유율 35%를 달성, 출시 1년 만에 업계 1위를 차지했다.

# 전자제품, 여성을 해방시켰나?

전기밥솥이 나왔을 때, 세상은 여성들이 드디어 밥하는 일에서 자유로워졌다며 소리를 높였다. 집안일에서 해방될 날도 머지않았다고 떠들었다. 밥은 전기밥솥에 맡겨 놓고 전화통만 붙잡고 있는 건 아니냐는 우려 섞인 기사도 신문에 실렸다.(동아일보 1975.10.8.) 지금은 청소기나 세탁기는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필수품이 됐고, 정수기 덕분에 물을 끓이고 물병을 닦을 일도 없어졌다.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이 감당해야했던 노동에 비할 바 아니다.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전자제품들은 정말 여성을 집안일에서 해방시켜줬을까? 밥솥에 넣을 쌀은 누가 씻고, 청소기의 먼지통은 누가 닦으며, 커튼을 떼고 침대보를 걷어 세탁기에 넣는 노동은 누가 하는 걸까. 반찬이 부실하거나 집안이 지저분할 때 부부 중 어느 쪽이 더 비난을 받고 책임감을 느낄까. 일하는 여성이냐 아니냐 하는 조건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컴퓨터가 바둑도 대신 두는 시대라지만, 전자제품은 여성을 집안일에서 해방시키지 못했다.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여성의 몫이 더 크다고 여기는 이들과, 집안일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이들과, 집안일은 ‘돕는 거’라 생각하는 이들과, 차별을 조장하고 묵인하는 사회가 발을 맞추는 한 해방은 점점 더 멀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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