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 인천여성회 회장

▲ 조선희 인천여성회 회장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거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산아제한정책을 펼친 때가 있었다. 형법에 낙태죄가 규정된 건 1953년이지만, 당시 낙태는 국책사업이었던 것이다.

영화 ‘잘 살아보세(2006년 개봉)’는 그 시절 전국 출산율 1위를 달렸던 시골 마을에 정부가 가족계획요원을 파견한 이야기를 다뤘다. ‘낙태버스’도 운영했다고 한다. 또 한 편의 영화가 있다. 2012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합헌을 결정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영화 ‘자, 이제 댄스타임’은 그때는 죄가 아니고, 이제는 죄인 낙태에 대한 이야기다.

50~60대 여성들의 낙태 경험 이야기와 젊은 여성들의 임신중절 경험 이야기가 나온다. 같은 일을 겪었지만 전해지는 느낌은 서로 다르다. 1970년대는 죄가 아니었지만 2010년대는 죄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산아제한정책에서 태아 생명권은 다뤄지지 않은 영역이었다. 물론 여성의 자기결정권도 그랬다. 한국여성민우회가 발표한 내용을 보면, 낙태죄는 생명 보호와 존중의 기능이 아닌 남성에 의한 관계 유지, 금전적 요구를 위한 협박수단으로 악용되고 있기도 하다.

얼마 전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소통광장 코너에 등록된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와 도입을 부탁드립니다’는 청원에 23만 5372명 참여했고, 청와대는 지난달 26일 “현행 법제는 모든 법적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고 국가와 남성의 책임은 완전히 빠져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 외에 불법 임신중절 시술과정에서 여성의 생명권ㆍ건강권 침해 가능성 역시 함께 논의돼야한다”며 2010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됐던 임신중절 실태조사를 8년 만에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헌재가 다시 한 번 낙태죄 위헌 심판을 다루는 점을 언급하며 “새로운 공론장이 열리고 사회적ㆍ법적 논의가 이뤄질 전망이다. 입법부에서도 함께 고민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지난 9월 28일 발족한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은 여성의 몸을 인구 통제도구로 삼아온 역사를 마감해야한다고 선언했고,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라는 선언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이미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실태조사가 얼마나 더 필요하고, 어떠한 공론장이 열려야 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공론화 과정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당사자의 목소리를 우선하는 것이다.

낙태죄 폐지를 원하는 여성들을 향해 ‘낙태를 찬성하는 것이냐’는 이분법적 질문은 던져서는 안 된다. 낙태를 찬성하는 게 아니고, 낙태죄를 폐지하자는 것이다. 낙태죄가 있다고 낙태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낙태죄가 폐지됐다고 낙태하는 여성이 많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임신ㆍ출산에서 차별이 있음도 인지해야한다. 장애아 낙태 허용, 장애여성 낙태 권유는 여전히 일어나고 있고 차별이다. 태아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대립을 넘어 임신ㆍ출산과 관련한 정보와 보건의료서비스에 접근할 권리 등을 포괄하는 ‘재생산권’의 정의를 세워내는 걸 공론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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