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인천문화재단 강화역사문화센터장
1882년(고종 19) 음력 6월 22일에 인천부사 정지용(鄭志鎔)이 자결했다.
“지금 일본(日本)과 화통(和通)하고 있지만 나라는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허실과 형편에 대하여 저들은 벌써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호조약을 맺으려는 그 속셈은 전적으로 피 흘리는 전쟁을 하지 않고 남의 나라를 빼앗자는 것입니다. (중략) 이제 큰 화란이 일어나 단번에 곧바로 쳐들어온다면 누가 그들을 막아내겠습니까? 신은 임금을 섬기는 몸으로서 그 독한 칼날을 받아 임금을 욕되게 할 수 없으니 오늘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도록 하소서”라는 장계를 임금에게 올린 뒤였다.
정지용의 자결에 대해 그가 임오군란 때 서울을 빠져나온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일행이 일본으로 탈출하기 위해 인천으로 도망쳤을 때 임오군란 소식을 모르고 외교관으로서 맞이한 일이 문제가 돼 부득이하게 선택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장계를 올리고 자결한 날 종2품인 한성부 좌윤으로 승진 임명된 것으로 보아 단정하긴 어렵다.
어떤 이에게 개항은 기존 낡은 질서를 뒤바꿔 새로운 도전을 가능케 한 조치였을지 모르지만, 많은 이들에게 개항은 국가 존망을 외세에 맡겨버리는 위험한 선택으로 인식됐다. 쇠약한 시기에 인천 지방관으로 3년을 재직하며 군사 숫자가 400명밖에 안 된다고 탄식한 정지용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으리라. 정지용의 선택을 시대 조류를 제대로 알지 못한 관료의 한계라고 쉽게 결론내릴 수 있을까?
정지용의 주장대로 일본과 단교하고 문을 닫아건다고 해서 조선이 국체를 보전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일본과 서구 열강이 조선의 입장을 존중했을 리도 없다. 어쨌든 정지용의 자결로부터 몇 개월 뒤 개항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문은 열렸고, 인천은 조선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하고 가까운 길목이 됐다.
개항장 인천에는 이국적이고 근대적인 문물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왔다. 가장 상징적인 것이 건물이다. 개펄이 펼쳐진 바닷가에 초가집이 줄지어있던 제물포에 ‘양관(洋館)’이라는 서양식 건물들이 들어서며 도시 풍경이 바뀌었다. 인천의 주인인 조선 사람들에게는 굳게 닫힌 건물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인천각’이라 부르는 제임스 존스턴의 별장은 특히 빼어난 외관을 자랑한다. 이를 복원하자는 주장이 10여년 전에 있었다. ‘창조적 복원’이라는 모순 가득한 용어를 앞세운 논리였다.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관광자원 확보라는 측면에서 존스턴 별장의 ‘재현’이 계획되고 있단다. 만약 지금까지 존스턴 별장이 남아 있었다면 적절히 고쳐 쓰는 건 흠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없어진 건물을 새로 만드는 것은 ‘복원’이든 ‘재현’이든 훨씬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개인이 자신의 기호에 따라 세우는 것이라면 상관할 일이 아니겠으나, 인천시 차원의 사업으로 추진하는 것은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볼거리를 만들어 많은 사람이 인천을 찾게 하겠다는 선의를 의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가장 나중에 할 일이다. 이런 일일수록 심사숙고해 시민들과 전문가의 박수를 받으며 개관할 수 있게 하는 게 마땅하다.
인천투데이
webmaster@bpnew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