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협동조합에서 산 춘장의 색은 검지 않았다. 캐러멜 색소를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춘장을 볶을 땐 춘장보다 기름을 두 배 정도 넉넉히 넣어야한다. 약한 불에서 뒤적여가며 춘장을 10분 이상 튀기듯 볶았다. 양파, 양배추, 감자 등을 볶은 뒤 기름에 튀긴 춘장을 넣어 함께 볶다가 물을 붓고 끓였다. 마지막에 전분 물을 풀어 넣고 한소끔 끓이니 연갈색의 걸쭉한 짜장소스가 됐다. 소스를 밥에 부어 한술 뜨려는데 그만, 눈물이 쏟아졌다.

춘장을 산 건 뱃속 아기 때문이었다. 입덧으로 두 달 가까이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고 있었다. 위가 비어 있으면 속이 더 쓰리고 메스꺼움도 심해서 그때그때 덜 역겹게 느껴지는 것들을 조금씩 목구멍으로 넘겨야 했다. 굶주림과 구토의 지옥에서 버티던 14주차, 드디어 입덧이 서서히 가라앉는 기미가 보였다. 반갑게도 먹고 싶은 것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 ⓒ심혜진.
그 중 가장 입맛을 당긴 것은 짜장면이었다.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 시켜먹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카라멜색소 같은 식품첨가물이 행여 아기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 걱정했다. 마흔이 다 된 노산에 출산 경험도 없고, 게다가 임신 초기여서 작은 것 하나에도 신경이 쓰이고 마냥 조심스러웠다.

몇 번을 망설였지만 끝내 중국집 전화번호를 누르지 못했다. 대신 생협에서 국산 춘장을 주문했다. 이제 며칠 있으면 짜장소스를 듬뿍 부어 밥 한 그릇 뚝딱 비울 수 있겠지. 춘장이 올 날을 기다리며 입맛을 다셨다.
며칠 후 병원에서 정기검진을 했다. 초음파 화면을 보던 의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양막(아기집)은 커졌는데… 아기가 하나도 자라지 않았네요” 계류유산이라고 했다. 아기 심장은 뛰지 않는데 여전히 태반과 연결돼있어 내 몸은 아직 ‘임신 중’이라 여기고 있는 상태. 의사가 말했다. “수술로 ‘제거’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산모가 위험해져요”

집에 돌아오니 현관 앞에 상자가 놓여 있었다. 병원에 간 사이 생협 물품이 배송된 것이다. 물건들을 정리하는데 춘장이 나왔다. ‘이제 필요 없는데. 반품해야하나…’ 잠시 망설이다 그냥 냉장고 안으로 쑥 밀어 넣어버렸다.

그날 밤은 참 길었다. 낮에 본 초음파 영상이 자꾸 떠올랐다. 왜 자라지 못한 걸까. 어디가 불편했을까. 많이 힘들었을까…. 눌러온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속도 메스꺼웠다. 입덧이 괴로워도 아기를 생각하며 참았는데 지금 이 메스꺼움은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다. 아기와 내가 함께 만들고 겪어온 이 모든 변화들이 곧 사라질 거라니 황망했다.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나와 함께 한 14주의 시간이 부디 너에게 고통의 시간만은 아니었기를. 귓속에 눈물이 스며들었다.

다음날 아침 느지막하게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고 춘장을 꺼냈다. 아직 뱃속에 아기가 있다. ‘너랑 함께 먹으려던 것이니 헤어지기 전에 먹자.’ 아기의 영혼에 바치는 마음으로 짜장밥 한 그릇을 최선을 다해 먹었다.

이후 한 차례 유산을 더 겪으며 다신 아기를 갖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기를 잃는 슬픔과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단 아기를 ‘제거’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고 비인간적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낙태(임신중절)는 부모에게 유전적 질환이나 정신장애가 있거나, 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에만 허용한다.

‘임신을 유지하는 것이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라는 조항도 있지만, 당시 내 건강은 괜찮았다. 나처럼 멀쩡한 여성의 배 안에서 사망(?)하거나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아기는 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어느 뒷골목에 있는 작은 산부인과에 100만원이 넘는 현금 다발을 들고 갔던 일, 아픈 배를 부여잡고 열 시간 동안 땀을 흘리며 침대를 뒹굴던 일, 진료카드도 작성하지 못한 채 수술대에 누운 일, 아기도 자존감도 한꺼번에 사라진, 온통 까맣던 그날. 3년이 훌쩍 지났지만 생각하면 여전히 아프다. 아마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나와 똑같은 일을 겪고 있겠지. 추운 거리에서 낙태죄 폐지를 외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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