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소성리

박배일 감독|2017년|미개봉

활처럼 굽은 등으로 유모차에 몸을 의지해 천천히 마당을 돌며 몸을 움직인다. 새벽같이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깨밭과 감자밭을 오가며 모종을 심고 김을 매고 감자를 캔다. 들깨 모종을 뽑아 나르다 아스팔트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다리쉼을 한다. 한여름 뙤약볕을 가려주는 나무그늘에 앉아 수박 한 조각으로 더위를 달랜다. 마을회관에서는 옹기종기 둘러앉아 밥을 나눠 먹는다.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풍경이다.

읍내에서도 한참 떨어진, 굽이굽이 산길을 타고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소성리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조용한 농촌마을이다. 주민 대부분이 나이 든 여성들. 소성리의 하루는 느리지만 부지런한 할매들의 손길로 채워진다.

2017년 4월 26일. 조용하던 소성리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사드가 전격 배치된 것이다. 미군들은 한국 경찰의 비호를 받으며 소성리에 들어왔다. 당황한 주민들, 절규하는 주민들을 재미있다는 듯 구경하고 휴대전화에 담으며. 그렇게 소성리의 일상은 산산이 부서진다.

감독은 사드 반대투쟁을 하고 있는 소성리 주민을 기록하기 위해 소성리에 들어갔겠지만, 그의 카메라에 담긴 것은 별 다를 것 없는 농촌 할매들의 일상이다.

단조롭기까지 한 농촌 할매들의 일상은,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사드 배치로 인해 깨져버린 평화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할매들의 주름진 얼굴과 굽은 등, 마디마디 불거진 거친 손은 한국현대사를 가로질러 살아남은 존재의 증명이다.

▲ 다큐 소성리의 한 장면.
가난한 농촌에서 먹고살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다가 자식을 잃은 할매도 있고, 한국전쟁에서 미군 폭격으로 마을이 불타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보도연맹으로 몰려 총살당한 이웃도 있었다. 이미 전쟁을 겪은 몸, 전쟁 같은 가난을 겪은 늙은 여성의 몸은 현재의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도 전쟁의 끔찍함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사드 배치 이후 시시때때로 마을 산등성이 위를 떠다니는 헬기와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가르는 전투기 소리가 마을을 뒤흔들 때면 늙은 할매들은 자연스레 당신들이 겪은 전쟁을 떠올린다. 집이 불타고 이웃들의 팔다리가 흩어지던 끔찍한 순간이 눈앞에서 재현되는 것만 같다. 이 할매들에게 사드는 전쟁 그 자체다. 전쟁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소성리에 들어온 사드는 순식간에 소성리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사드가 배치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이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소성리에 쳐들어온다. 스스로 ‘서북청년단’을 자임한 그들은 온종일 확성기에 대고 소성리 할매들을 ‘빨갱이’ ‘종북’이라며 온갖 저주의 말을 퍼붓는다. ‘빨갱이라고 동네 사람들이 수도 없이 끌려갔지. 이웃집 아재가 빨갱이로 몰려 저쪽 천가에서 총살당했지. 나더러 바로 그 빨갱이란다’ 할매들의 몸에 새겨있던 공포의 기억이 또렷이 살아난다. 전쟁은 한참 전에 끝난 줄 알았는데, 빨갱이 낙인찍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드 배치는 국가 안보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들 한다.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합의 절차도 필요 없다고 한다. 소성리 할매들을 보며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사드로 지키려는 국가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을 짓이기고 낙인을 찍는 것이 국가라면, 그렇게 해야만 얻을 수 있는 안보라면, 그 국가 안보가 과연 필요한가?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면 좋겠다. 소성리 할매들의 일상을 만났으면 좋겠다. 평화란 아주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이 할매들의 느리지만 부지런한 일상이다. 소성리 할매들의 일상을 짓밟은 폐허 위의 평화는, 국가 안보는 거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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