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인천문화재단 강화역사문화센터장

 
조선 세조가 즉위한 지 5년째인 1459년 음력 11월 5일(양력 11월 29일), 인천군(仁川郡)을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로 삼았다. 왕비인 정희왕후의 외가가 인천이었기 때문이다.

태종 13년인 1413년 음력 10월 15일(양력 11월 8일)에 인주(仁州)를 인천군으로 바꾼 지 46년 만의 일이니, 고려시대 인주이씨 가문의 위세 속에 7대에 걸쳐 임금의 배필을 배출한 고장으로서 자긍심을 간직한 사람들에겐 무척 감격스러운 조치였을 것이다.

이렇게 옛 인천고을의 중심 중 중심이라 할 인천도호부의 실체는 남구 문학동 문학초등학교에 남아 있는 일부 건물에서 볼 수 있고, 전체적인 배치와 규모는 문학경기장 맞은편에 새로 재현한 인천도호부 건물군에서 알 수 있다.

문학초교에 남은 도호부 건물은 인천시 유형문화재 1호로 지정됐는데, 공식 문화재 명칭은 ‘인천도호부청사(仁川都護府廳舍)’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2호는 계양구 계산동 부평초교에 있는 부평도호부 건물로, 문화재 명칭은 ‘부평도호부청사(富平都護府廳舍)’다.

시청사와 구청사를 떠올려 도호부의 건물군을 도호부청사라 부르는 게 무슨 문제인가 하고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그 당시에 부르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청사(廳舍)’를 검색해보면 조선 초기부터 그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청사’라 번역한 기록의 원문을 대조해보면 ‘청(廳)’이나 ‘영(營)’을 그렇게 번역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가 쓰는 것과 같은 의미의 ‘청사’라는 용어가 나온다. 그 전에는 쓰지 않던 용어가 고종ㆍ순종실록에 쓰인 이유는 무엇일까. 태조부터 철종까지의 실록은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이고, 고종ㆍ순종실록은 일본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람들도 낭청(郎廳)이나 객사(客舍)에서 알 수 있듯이 ‘청’과 ‘사’란 용어를 썼지만 ‘청사’란 용어는 쓰지 않았다. 비슷한 예가 ‘사회(社會)’다. 우리가 너무 자주 쓰는 말이고 한자로 돼있어 옛부터 써온 용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회는 영어 소사이어티(Society)를 일본 사람들이 번역한 말이다. 조선시대까지는 ‘사(社)’와 ‘회(會)’를 따로따로는 썼지만 합쳐 쓰지는 않은 것이다.

조선시대 기록에서 현재의 청사와 비슷한 의미로 쓴 것은 관아(官衙)ㆍ관해(官廨)ㆍ공해(公廨) 등의 용어다. 모두 관청의 건물들을 총칭할 때 쓰는 말이다. 청사 대신에 적합한 말을 고른다면, 가장 대중적인 관아가 적당할 것이다.

인천시정부는 인천의 정체성 찾기 사업에 힘을 쏟아 문학산 개방 등의 성과를 거뒀고, 더 많은 성과를 위해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다. 물론 그중에는 문학산 타워나 개항장 일대 근대 건축물 복원 등, 논란이 되는 사례가 있다.

가시적으로 뭔가를 보여주는 데는 타워나 건물 복원이 효과적이겠지만, 인천이란 도시의 근본을 튼튼히 한다는 측면에서는 ‘도호부청사’를 ‘도호부관아’로 바꾸는 것과 같이 이름과 실체가 잘 맞는 명실상부(名實相符)한 도시로 가는 일부터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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