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채윤 비온뒤무지개재단 상임이사, 인천서 강연 ... <인천투데이>ㆍ인천여성회 주관 ‘성평등 교육’ 강좌

<인천투데이>과 인천여성회가 지역공동체캠페인 ‘성평등 도시 인천 만들기’ 일환으로 진행하고 있는 ‘성평등 교육’ 강좌 여덟 번째가 지난달 31일 저녁 인천여성회 교육실에서 열렸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이자 비온뒤무지개재단 상임이사인 한채윤씨가 초청돼 강연했다.

한채윤씨는 “성적소수자인권센터와 같은 단체에 한 번도 항의한 적 없는 일부 개신교 집단 등이 조직적으로 성평등 관련 강연을 방해하고, 정부가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할 때나 지방자치단체가 인권조례를 만들려할 때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들에게 집단민원을 넣기도 한다”며 “이렇게 하는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누군가의 전략적 지침에 의해 움직이는 건 아닌지, 의문이다. 그 의문은 10여 년간 지속됐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아래는 한채윤씨의 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공론화…아직도 먼 성평등

▲ 한채윤 비온뒤무지개재단 상임이사. 그는 성적소수자 차별에 대한 우리사회의 입장을 공론화해야한다고 강조했다.
19대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동성애와 차별금지법이 이슈로 부각했다. 이를 공론화한 것 자체가 의미 있다며 일각에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안은 1997년부터 5년마다 대선 후보에게 던져진 질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사안의 핵심인 성적소수자 인권 보장, 즉 인권을 어떻게 판단하고 대해야할 것인가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사회는 아직 ‘성평등’과 ‘양성평등’을 놓고 논쟁하는 상황이다. ‘성평등’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토론회나 행사엔 정부예산 집행이 막혀 있고, 일부 개신교 집단을 주축으로 한 ‘동성애 반대’ 집단의 민원으로 담당공무원이 애를 먹는다.

양성평등은 생물학적 성인 남성과 여성만을 전제로 하며, 성평등은 이성애자나 양성애자 등 성적소수자를 포함한 것을 전제로 한다. 성평등이든, 양성평등이든, 성별로 인해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걸 추구한다.

우리나라에 차별금지법이 처음 등장한 때는 1997년 대선이다. 지역, 즉 호남 차별 방지에서 비롯했다. 김대중 정부는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으로 시작했다. 차별행위를 처벌하는 것보다 예방이 중요한데, 가장 많이 차별하고 인권을 탄압한 것은 국가였다. 국가인권위 설립은 그런 국가를 감시하겠다는 의도였다. 거기엔 IMF 사태 이후 세계적으로 떨어진 국가 위상을 ‘한국은 인권을 보장하는 선진국’이라는 것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면도 있었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2012년까지 민주당의 주요 대선공약이었다. 하지만 2017년 대선공약에서 빠졌다.

4.19 혁명이 일어난 1960년, 그해 봄 서울 명동거리에서 한국YWCA가 주최한 ‘축첩 반대’ 시위가 열렸다.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들고 있는 현수막엔 ‘첩 둔 남편, 나라 망친다’ ‘아내 밟는 자, 나라 밟는다’ 등이 적혀있었다. 이듬해 5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공무원은 축첩이 안 된다’며 첩을 두면 해고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그 이후 반세기가 더 지나 박근혜 정부 시절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소강석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 여성 정치인들 육중한 몸매인데, 우리 대통령은 여성으로서 미를 갖추고 있어…” 어떤 대통령도 이렇게 평가받지 않는다. 성평등은 아직 멀었다.

친일경력 개신교 집단과 독재정권의 공생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그 징후와 맥락이 있기 마련이다. 역사적 흐름이 있다. 그걸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1863년, 고종이 즉위했고, 미국에선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그에 앞서 1859년엔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했다. 창조설이 아닌 진화설을 주창한 것이다. 어마어마한 논쟁이 벌어졌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중앙집권 통일국가를 이룬 일본은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1875년 일본군함 운양호 사건을 일으켰다. 그 이후 조선은 엄청난 격동에 빠져들었다. 여기서 천주교 박해와 달리 개신교가 매우 놀라온 속도로 확산된 걸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885년부터 한반도에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교회는 힘없는 사람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1909년에 작성된 ‘한반도 선교지 분담도’를 보면, 선교사 파견이 매우 조직적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1914년에 이화학당이 대학과 1회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이화학당은 1886년 5월 31일 미국 북감리교 여자 선교사 스크랜튼(M. F. Scranton)이 한성 황화방(현 서울시 중구 정동) 자택에서 여학생 1명을 데리고 교육한 것에서 비롯했다. 1907년엔 최초의 한국인 목사 7명이 배출됐다. 1919년 3.1운동엔 기독교인도 많이 참여했다. 목회자가 학살을 당하고, 교회가 파괴당하기도 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된 목회자들도 있었다. 반면에 1938년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임원들이 신사참배를 했다.

이들은 1944년엔 일제에 일명 ‘애국기’라는 전투기 3대 값 21만원을 헌납하기도 했다. 그 대가로 교회는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들은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사립학교를 설립해 운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이 패망했다. 그들의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일제에 저항했던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기독교의 정통임을 내세웠다.

한편, 북쪽의 조선공산당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기치로 1946년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이때 땅을 빼앗기고 친일행적 때문에 위협을 느낀 서북지역(평안, 황해, 함경도) 목회자들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남쪽 전역에 흩어져 교회를 만들었다. 이 때 같은 이유로 남쪽으로 내려온 청년들이 이승만의 친위부대라 할 수 있는 ‘서북청년단’을 만들기도 했다. 서북청년단 단원들은 제주 4.3항쟁을 진압하는 경찰과 군대에 편입돼 양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3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은 개신교 신자였다. 부정선거로 권좌를 유지했던 그는 지지부대가 필요했고, 친일경력을 감추고 싶은 사람들과 손을 잡았다. 개신교 집단도 하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방송이 기독교방송(CBS, 1954)이고, 극동방송(1956)도 기독교 방송임이 그걸 보여준다. 1956년 대선에선 ‘백만 기독교도는 두 분을 세우자’는 포스터가 나붙기도 했다. 여기서 두 분은 이승만 대통령 후보와 이기붕 부통령 후보였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5년 6월엔 기독교인 1800여명이 모인 가운데 ‘구국십자군 창군식’이 열렸는데, 구국선교단(총재 최태민) 명예총재인 박근혜가 참여해 “굳센 신앙으로 나라를 지키는 일이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길이며,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나라와 민족, 자유세계를 지키는 초석이 되어 달라”고 말했다. 이듬해엔 ‘전국 기독교 멸공 총궐기대회’가 열렸다. 박정희 정권이 독재정권이라는 인식을 희석하기 위해 ‘멸공’을 내세우고, 개신교 집단을 지지부대로 활용했음을 볼 수 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됐다. 그동안 친정부세력으로 지냈던 이들에겐 위협이었다. 이때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전개되는 등, 개신교에도 굉장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런데 노태우가 대통령이 됐다. 1990년 3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창립 기념 예배엔 노태우 대통령도 참석했다. 노태우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지원했다는 것은 정설 아닌 정설이다. 장로 출신인 김영삼 정부 역시 친미와 반공을 중시했다.

과거 친정부세력의 위기와 반정부투쟁

▲ 강연 중인 한채윤 비온뒤무지개재단 상임이사.
김대중 대통령 시절(1998~2002년)에 언론의 ‘교회 비리’ 보도가 잦았다. 교회 세습과 이전투구가 주된 내용이었다. 당시 인터넷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비리 표출 공간이 확장된 영향이 크다. 이로 인해 교회의 신뢰도가 점점 떨어졌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등, 남북 화해와 협력이 활성화되며 ‘반공’이 설 자리도 좁아졌다.

2001년 조갑제의 선동이 시작됐는데, 그는 ‘한국에서 보수를 지키는 참 보수는 개신교다’라며 조용기 목사 초청 강연을 열기도 했다. 한편,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나서 보니 ‘미군이 여중생 두 명(미선이와 효순이)을 장갑차로 죽였는데, 무죄’란다. 월드컵 4강까지 한 나라인데, 이게 뭐냐며 분노한 국민들이 촛불시위로 일어섰다. ‘줏대 있는 나라’를 바란 국민들은 노무현을 16대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이때부터 일부 개신교 집단의 반정부 투쟁이 시작됐다. 2003년 3월 서울시청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고, 2004년 10월 4일엔 ‘대한민국 수호 국민대회’를, 2006년 6월 6일엔 ‘호국 기도회’를 개최했다. 최근 박근혜 탄핵 반대 ‘태극기 집회’ 모습과 유사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개신교 집단의 반정부 투쟁 참여는 그들의 심각한 위기감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개신교 총인구가 1995년 전체 인구의 19.7%에서 2005년 18.3%로 1.5%포인트 줄었다.(출처ㆍ강인철의 ‘민주화와 종교’) 또한 노무현 정부는 사립학교법 개정을 추진했다. 사립학교는 일부 개신교 집단의 존립기반이기도 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정치 직접참여 시도로 이어지기도 했다. 2004년 17대 총선부터 1인 2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도입됐는데, 이때부터 기독교에서 정당을 만들어 선거에 참여했다. 하지만 2016년 20대 총선까지 득표율은 3%를 넘지 못했다. 2008년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사학과 개신교는 서로 손잡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공격했다. 그 결과, 전교조는 법외노조가 됐다.

동성애 찬반이 아닌, 우리사회의 성적소수자 차별에 대한 입장 중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금, 차별금지법이 다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2007년 10월에 만들어진 의회선교연합은 기자회견을 열고 차별금지법안 저지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일부 개신교 집단은 차별금지법을 ‘동성애(자) 차별금지법’으로 비화했다. 동성애에 ‘에이즈’나 ‘빨갱이’를 연관시켰고, ‘동성애 허용하면 우리 국군 무너지고 김정일만 좋아한다’는 구호까지 내걸었다. 그런데 2014년부터 구호가 바뀌었다.

이른바 ‘빨갱이 약발’이 예전처럼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2014년 이후 동성애자를 ‘가정을 파괴하는 악마집단’으로 묘사한다. 아울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든 젠더(gender; 생물학적 성에 대비되는 사회적 성)가 문제’라고 주장한다. 여자는 여자다워야 하고,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게 기조다. 이들이 차별금지법 하나만을 반대하기 위해서 이러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종교인 과세’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보자. 1968년에 이낙선 초대 국세청장이 ‘성직자 근로소득세 부과’를 추진하다 실패한 게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여러 논란이 이어진 뒤 2014년 현오석 당시 부총리가 종교인 과세를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나, 국회 논의에서 유예됐다. 2015년 정부 세법 개정안에 종교인 과세를 포함하기로 했고, 2018년부터 시행하기로 여야가 합의했다. 천주교는 이미 내고 있고, 불교는 내겠다고 했지만 내부 정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기독교는 내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다. 종교인 과세에 차별금지법을 묶어 ‘정부가 개신교를 탄압하려한다’고 맞서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개인 인권 보호를 위해 합리적이지 않은 모든 종류의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이다. 미국과 유럽 등에선 19세기 말부터 여러 형태의 차별금지법이 제정돼왔고, 유엔도 지속적으로 한국 정부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해왔다. 법무부에서 2007년 입법예고한 이래 3차에 걸쳐 발의됐으나 일부 개신교 집단 등의 반대로 무산됐거나 국회 계류 중이다.

이들은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동성애를 반대하면 잡혀간다’고 이야기한다. 정말 몰라서 이러는 걸까? 그들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 정치상황과 어떻게 연계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차별과 혐오에 대해 사회가 민감하지 못하면, 이런 억지는 더 창궐한다. 그 배후를 봐야한다. 교회에서 사명을 주면 그 사명을 신이 준 것이라고 여긴다. 차별금지법에 담긴 내용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어떠한 차별이라도 용인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한다. 그게 물론 쉽지 않다. 동성애 반대를 주도하는 이들이 ‘동성애아카데미’를 꾸렸다. 전국 교회를 돌며 교육하겠다며 강사 양성까지 한단다. 이걸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2013년 기준 한국의 종교시설 현황을 보면, 사찰 9000개, 교회 6만 3000개, 성당 1664개다. 승려나 신부보다 목사 수가 훨씬 많다. ‘15~19대 국회의원 종교 분포’(출처ㆍ강인철의 ‘민주화와 종교’)를 보면, 적게는 34.4%에서 많게는 41.0%가 개신교 신자다.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깊이 고민해야한다.

차별금지 문제를 동성애 찬반 문제로 봐서는 안 된다. 동성애는 현존하는 객관적 실체다. 동성애에 대한 개인적 감정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객관적 실체를 놓고 찬반을 이야기하는 건 성립하지 않는다. 성적소수자를 차별하는 것에 대해 우리사회가 어떠한 입장을 가져야하는가가 중요하고, 그걸 공론화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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