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배 노동자교육기관 회원

 
촛불로 만든 정권이 촛불시민과 함께할 일이 참 많은 때다. 그래도 잊지 말아야하는 일이 있어 ‘김태일’을 꺼냈다.

전태일 열사는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에 모두 등장하며 “1970년 평화시장 재단사였던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계기로 지식인, 노동자, 학생들이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노동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라고 기술돼있다. 올해도 노동자들은 전태일 열사가 세상을 뜬 11월에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를 연다.

그런데 ‘김태일’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태일은 전태일 열사가 태어난 1948년, 16세에 죽임을 당한 분이다. 검색창에 ‘김태일’이라고 넣어봐도 찾기가 어렵다. 연관검색어로 ‘한신교육투쟁’이라고 넣어야 김태일 이름 석 자를 겨우 만날 수 있다. 일본야구 한신타이거즈의 그 한신이고, 오사카와 고베지역이다.

재일조선인들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귀국을 준비하면서 일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을 위해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르치는 ‘국어강습소’를 세우기 시작했다. 당시 재일조선인의 아이들은 국내와 마찬가지로 황민화 교육 때문에 우리말과 글을 읽고 쓸 수 없었다. 귀국할 내 자식에게 우리말 교육은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그래서 일본 각지에 국어강습회가 열렸고, 독자적으로 교재를 제작하고 우리말과 글을 가르쳤다.

해방 이후 1946년 3월까지 150만명이 귀국했지만, 불안한 국내 사정과 매우 적은 반출재산과 같은 여러 이유로 귀국하지 못한 재일조선인이 64만명(한국 출신 98%, 북한 출신 2%)이나 됐다. 일본 전역에는 조선학교 500여개에 학생 6만명 정도가 있었다.

1947년 10월, 연합군 최고사령부 맥아더 사령관은 일본정부에 재일조선인을 일본의 교육법, 학교교육법을 따르게 하라고 지시했다. 이를 받든 일본정부는 1948년에 조선학교를 불법 학교라며 강제 폐교 조치했다.

재일조선인들은 패전국인 일본에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배울 수 없다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고, 다시 식민지로 돌아가는 심정이었다. 이러한 학교 폐쇄령에 저항했고, 일본경찰은 무력으로 학교를 빼앗았다.
이 사건이 재일조선인 민족교육사상 최대 사건인 ‘4.24 한신교육투쟁’이다. 무력 진압하는 일본경찰의 총탄에 소년 김태일이 숨졌다. 24일부터 사흘간 우리 동포 연인원 100만 3000명이 참가했고, 그중 검거 3076명, 기소 212명, 부상 150명, 사망 1명이 발생했다. 이 일로 오사카시 경찰국은 미국육군 25사단 사령부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계속된 저항으로 조선학교는 일본정부로부터 1948년 5월 공식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았지만, 지금까지 차별을 받고 있다. 일본정부는 2013년에 교육의 기회균등을 목적으로 ‘고교무상화’제도를 도입할 때 조선학교만 제외했다.

이 부당한 차별 조치에 항의해 오사카, 아이치, 히로시마, 규슈, 도쿄의 조선고급학교 학생들이 일본을 상대로 ‘조선학교 고교무상화 적용 제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나섰다. 제2의 한신교육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전태일과 김태일이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전태일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했듯이, 김태일의 죽음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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