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평론] 랩걸

호프 자런 지음, 김희정 옮김 | 출판사 알마 | 2017.02.

‘랩걸’은 한마디로 놀라운 책이다. 과학자라면, 세상의 풍파에서 벗어나 자연과 우주의 비밀을 파헤치는 사람이라 여기기 십상이다. 괴짜이지만 천재라는 이미지도 강하다. 부모 몰래 이런저런 실험을 하다가 사고를 치고, 이를 수습하려 애면글면하는 모습도 떠오른다. 그런데 이 책은 아니다. 대학교수 자리를 지키려고 전전긍긍하고, 연구비를 따려고 애면글면한다. 식물의 성장을 연구하지만 연구비는 전쟁을 위한 과학에 몰렸다. 그래서 사제폭탄이 터질 때 나오는 아산화질소를 식별하는 기계를 연구했다. 일주일에 40시간은 폭발물 프로젝트에 전념하고, 또 다른 40시간은 식물학 실험에 바쳤다

인정받고 격려받기보다는 백안시의 대상이다. 너무 예민하다는 경고를 받았고, 비정하고 무감각하다는 비난도 들었다. 연애가 잘 되지도 않았다. 많은 사람이 연구실 동료인 빌을 의심했다. 너무나 밀접한 관련을 맺고 연구를 하는지라 모종의 관계가 있으리라 추측했다. 그러나 빌은 동료일 뿐이다. 사람에게는 인연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콜린트를 만났다. 같은 대학에서 같은 과목을 듣기도 했는데 몰랐다니 믿기지 않았다.

 
결혼했고 임신했다. 그런데 조울증이 문제였다. 6개월 동안 약을 먹을 수 없어 온몸으로 그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심하게 구토하다 목욕탕 바닥에 쓰려져 헛구역질과 울기를 반복하다 기절해버리고 싶어 벽이나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기까지 했다. 연구나 일상이나 무엇 하나 편하게 풀려나가지 않았다. 고투라는 낱말이 그녀에게 맞춤하다.

그녀의 고향은 미네소타다. 증조할아버지 때 노르웨이에서 집단 이민했다. 1년에 9개월이나 눈이 쌓여있는 동네다. 동네 사람들은 주로 베이컨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와 한 전문대에서 물리학과 지구과학 입문을 가르치는 교수로 일한 과학자였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자랐다.

“겨울밤 아버지와 내가 공작과 왕처럼 과학관 전체가 우리 것인 양 누비고 다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와 나는 우리의 성을 둘러보느라 너무 바빠 우리를 기다리는 바깥 왕국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어린여자아이에서 과학자로 변신했다.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으로 변신한 것처럼. 내 경우는 반대방향의 변신이기는 했지만”

엄마는 고학으로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힘에 부쳐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해 아이 넷을 낳았다. 막내가 유치원 갈 무렵 학사학위를 따겠다고 통신과정으로 영문학을 공부했다. 엄마랑 종일 함께 있었던지라 어깨 너머로 영문학을 배웠다. 초서의 작품을 읽고, ‘천로역정’에 나온 상징을 레시피 카드에 적었다. 어머니는 헤어롤을 머리카락에 감으면서 칼 샌드버그의 시를 녹음한 테이프를 들었다. 시 감상하는 법도, 책 읽는 법도 만학도인 어머니한테 배웠다. 책 읽다보면 빼어난 수사학이 인상 깊은데,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덕이다

‘랩걸’의 구조는 독특하다. 한 부분이 자서전적 성격을 띠는 대목이 나오면, 다음 대목은 반드시 나무에 대한 지식을 서정적으로 풀어놓는다. 단 한 알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키워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는 거목이 되는 과정은 감동 그 자체다. 어쩌면 과학자로 성장하는 과정과 한 그루의 나무로 자라는 과장이 유사하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그리한 모양이다. 내밀한 과학자의 일상적 세계와 그가 사랑한 나무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한 책인지라, 한마디로 ‘랩걸’은 대단한 책이라는 말을 들을만하다.

/이권우 시민기자

※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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