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희 인천여성회 회장
긴 연휴 동안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과 현재를 살고 있는 일본군‘위안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봤다. ‘남한산성’엔 여성의 목소리가 없었다. 김상헌이 여자아이에게 떡국을 내밀자, “소녀는 부엌에서 많이 먹었습니다’라는 목소리가 거의 유일하다. 당시 조정대신 중에 여성은 있을 수 없었다. 국가 운영에 양인의 목소리도 담길 수 없었다. 김상헌이 말한 것처럼 정치는 삶의 현장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담아야 하는데 그 시절 정치는 그것이 주목적이 아니었다. 지금의 정치는 그 때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반면 ‘아이 캔 스피크’는 여성의 목소리가 큰 울림을 줬다. 일본군‘위안부’였던 옥분의 입을 닫게 만든 것은 옥분의 엄마, 가족, 이웃이기도 했다. 우리 사회가 그녀의 말을 들을 준비가 돼있지 않았기에, 그녀는 입을 닫고 살았다. 그녀는 늙어서도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를 말하지 않은 채, ‘I can speak’를 준비했다. 그리고 옥분이 말할 수 있게 해준 것도 결국 사회 구성원들이었다.

미국 의회에서 옥분은 ‘위안부’라는 ‘증거를 대라’는 일본 대표의 말에 일본군이 자신의 배에 칼로 새긴 욱일승천기를 보여줬다. 그동안 옥분은 누구에게도 그 상처를 보여줄 수 없었다. 숨겨야 살 수 있었으리라.

옥분의 증언으로 일본군‘위안부’는 역사 속 과거가 아니라 현재로 다가온다. 이제는 말할 수 있는 그녀.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돼있는가? 아주 오랫동안 그녀가 말 할 수 없었듯이, 지금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 말을 해도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는 목소리를 생각했다.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 드러나지 않았던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돼있는가? 영화를 보면서 하게 된 생각 중 하나다. 소수자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돼있는지, 정치는 과연 누구의 목소리를 담아야하는가가, 두 영화가 내게 던진 메시지였다.

‘남한산성’을 먼저 보고 ‘아이 캔 스피크’를 나중에 봤기에, 내 연휴는 즐겁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세계를 누비며 증언하는 옥분의 모습에 기운을 얻기도 했고, 옥분의 이웃들이 보여준 따뜻한 마음을 느끼며 옥분이 증언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아마도 동네잔치를 열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아이 캔 스피크’를 보면서 영화 ‘암살’이 떠오르기도 했다. 전쟁 중 몸에 상처가 난 것은 둘이 같은데, 전혀 다르게 읽혀졌다. ‘암살’에서 염석진은 상처를 보여주며 ‘훈장’처럼 말했다. 염석진의 상처는 영웅의 징표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옥분은 대중목욕탕도 못 갔을 것이다. 염석진의 상처는 영광이고, 옥분의 상처는 수치로 읽힌다. 염석진은 저항자이고, 옥분은 피해자여서 그런 것만은 아닐진대.

우리 사회는 왜 피해여성이 말을 못하게 작동하는 걸까? ‘위안부’ 피해자임을 말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고, 성폭력 피해 경험을 말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고, 성소수자임을 말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는 시절이 된 것도 아니다. 자신의 삶을 그대로 이야기해도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 돼야 그들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회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