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아이 캔 스피크(i Can Speak)

 
시장에서 수선일을 하며 홀로 사는 나옥분(나문희) 여사는 동네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 하나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는다. 담배꽁초 투기, 노상방뇨, 불법 입간판 설치… 사소해 보이는 불법행위지만 옥분의 눈에 띄면 국물도 없다. 가로등이 망가지거나 건물에 금이 가거나 하수도가 막혀도 곧장 구청으로 달려간다. 민원실 공무원들은 옥분이 나타나기만 해도 벌벌 떨며 슬금슬금 피한다.

‘도깨비 할머니’로 악명 높은 옥분 앞에 어느 날, 앞뒤 꽉 막힌 원칙주의자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가 나타난다. 민재는 극성스러운 옥분의 민원에 따박따박 원리원칙을 내세우며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인다. 옥분이 열심히 하는 일이 또 하나 있었으니, 영어 공부다. 독학도 해보고 학원도 다녀봤지만 도통 늘지 않는 영어실력에 학원에서는 쫓겨나기 일쑤.

우연히 민재가 원어민 수준의 영어 능력자임을 안 옥분은 민재에게 영어선생님이 되어줄 것을 끈질기게 부탁한다. 갖은 꼼수를 써가며 옥분을 피해 다니던 민재는 우여곡절 끝에 옥분의 영어선생님이 되고, 민재는 옥분이 왜 그렇게 영어를 배우려 기를 쓰는지 속사정을 알게 된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미국 하원의회에서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던 2007년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극영화다. 역사적 무게가 있는 사건을 소재로 했지만 ‘광식이 동생 광태’ ‘시라노; 연애조작단’ ‘쎄시봉’ 등, 감성 드라마를 만들어온 김현석 감독의 장기를 살려 코믹하면서도 뭉클하게 풀어냈다.

옥분이 기를 쓰고 영어를 배우려했던 것은 과거에 겪었던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옥분이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단지 언어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해방돼 고향에 돌아왔을 때 옥분의 어머니는 딸을 안아주는 대신 입을 틀어막았고, 옥분은 정부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하는 것조차 회피한 채 홀로 살았다.

일본군‘위안부’ 경험을 한 생존자들은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있기 전까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생존자들의 끈질긴 투쟁이 있기까지, 모국인 대한민국조차 ‘없는 존재’로 취급했던 이들이다. 옥분의 어머니가 그랬듯, 모국은 그들을 더럽혀진 여자, 수치스러운 존재, 아예 지워서 없애야 할 존재로 대했다. 그런 상황에서 옥분과 같은 생존자들이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는가.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i Can Speak’다. 대문자 I가 아닌 소문자 i. 존재조차 부정당하는 소문자 삶이 말을 한다는 것. 그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미국 하원의회 청문회에서 증언하려는 옥분을 두고 당신이 ‘위안부’였는지 믿을 수 없다며 증언 자체를 거부하는 의원들 앞에서, 옥분은 일본 군인들에게 난도질당한 자신의 배를 보여준다. 하지만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의원들 앞에서 입이 굳어버린다. 그렇게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는데도 말이다. 그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민재가 청문회장에 나타나자 비로소 옥분은 입을 연다.

소문자 삶이 말할 수 있으려면, 그들의 용기를 요구하기에 앞서 그 삶을 ‘들을 귀’가 있어야한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이야기하는 나는, 우리는, 대한민국은, 과연 소문자 삶을 들을 귀를 가졌는가. 영화 ‘아이(i) 캔 스피크’가 우리에게 던지는 뼈아픈 질문이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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