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허우범 시민기자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10> 투루판 고창고성

제일 낮고, 덥고, 건조한 도시

▲ 국씨 고창국의 도성이었던 고창고성.
고성(故城) 가는 길이 온통 타오르는 불길이다. 이글거리는 햇살은 땅 위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하다. 투루판은 해수면보다 150여 미터나 더 낮은 분지다. 투루판이라는 지명도 위구르어로 ‘파인 땅’이라는 뜻이다. 분지인 까닭에 더위도 만만찮다. 햇살이 기승을 부릴 때 이곳에 서면 그야말로 장작불 때는 가마솥에 들어와 있는 격이다. 오죽하면 화주(火州)라고 불렀을까.

중국인들은 투루판을 가리켜 ‘제일 낮고, 제일 덥고, 제일 건조한 도시’라고 한다.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루판은 예로부터 모든 권력자들이 탐내는 곳이었다. 그것은 실크로드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투루판은 흉노와 한나라의 전쟁 사이에서 부침이 심했다. 5세기 중반, 국씨(鞠氏) 고창국(高昌國)이 이곳에 도읍을 건설하며 투루판 지역은 200년간 중심지 역할을 한다.

한때 동서무역의 집산지였던 고창국

▲ 폐허가 된 고성을 둘러보는 관광객들.
고창고성은 교하고성과 다르게 흙벽돌로 쌓았다. 도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되고, 별도의 궁성이 있었다. 둘레 5킬로미터의 외성은 높이가 약 11미터에 성벽 두께는 12미터였다. 성 남쪽에는 성문이 3개 있었고, 나머지 삼면에는 각각 문 2개가 있었다. 도성의 웅장한 규모가 당시 고창국의 위상을 대변해준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고성을 폐허로 만들었다. 몽골의 침입으로 무너지고 세월의 풍사(風沙)로 부서졌다. 인간이 건설한 도시는 언제나 인간으로 인해 무너진다. 그리고 인간이 버리고 떠난 도시를 정화시키는 것은 언제나 자연의 몫이다.

고흐의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고성은 폐허의 흙더미로 빼곡하다. 그 틈새를 비집고 달려오는 열기가 숨을 턱턱 막는다. 그늘 없이 걷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노새가 끄는 마차를 탔다. 바람이 그늘에 숨었던가. 한결 시원하다. 고창국은 독실한 불교 국이다. 대 불사 터가 성 남서쪽에 지금도 웅장하게 남아 있다. 불사 터 앞에는 15미터의 불탑이 아직도 그 불심을 뿜어내고 있다.

불사 터로 향하는 길은 대로다. 전성기의 고창국은 동서무역의 집산지였다. 이 대로(街)를 중심에 두고 시장(市)과 거주지(坊)가 있었다. 떠들썩한 흥정 너머로 평온한 예불소리 울렸을 거리. 너무도 고요해 오히려 괴괴한 길은 나그네의 마차바퀴 소리만 달그락거린다. 그때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고창국왕과 젊은 법사 현장

▲ 현장 법사가 설법한 사원 터.
630년 2월. 현장은 독실한 불교 신자인 고창국왕 국문태의 초청을 받아 합밀(哈密)에서 고창으로 왔다. 당시 고창국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는데, 국왕은 한족 출신이었다. 왕은 현장이 고창국에 남아줄 것을 원했다. 하지만 현장은 인도로 가야만 했다. 왕이 반대하자, 현장은 단식투쟁에 돌입한다. 단식투쟁 3일째, 왕은 현장이 세 가지를 수락하는 조건으로 인도행을 허락한다.

왕과 형제의 의리를 맺고, 한 달간 인왕반야경을 설법하고, 인도에서 돌아올 때 다시 들러 3년간 공양을 받는 것이다. 현장은 이를 수락한다. 그리고 한 달간 설법을 마치고 인도로 향한다. 국왕은 현장이 순례하는 동안 필요할 사람과 물건을 주었다. 주변 여러 나라들이 현장의 인도행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도 써주었다. 당시는 고창국이 주변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때였다. 현장은 고창국왕의 후원으로 인도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현장은 어디에서 설법을 했을까. 다행스럽게도 현장이 설법했다는 돔형 사원이 남아 있다. 사원 터에서 당시 현장의 설법 장면과 이를 진지하게 듣는 고창국왕과 백성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래서인가, 사원의 벽과 감실에는 아직도 1400년 전의 열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현장은 왜 들은 정보까지 장안에 전했을까

▲ 폐허로 변한 고성의 잔해들.
현장은 고창국왕의 협조 아래 순탄한 순례를 한다. 아기니국(阿耆尼國, 카라샤르), 굴지국(屈支國,쿠차) 등을 거쳐 지금의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와 테르메즈를 통해 인도로 간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현장이 거쳐 간 나라들이 곧바로 당나라의 지배를 받는다. 이오국(伊吾國, 합밀)이 항복하고 고창국(高昌國)이 항복한다. 아기니국, 굴지국도 마찬가지다. 승려인 현장과는 관계가 없는 우연한 일인가.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도 석연치 않다.

당나라는 강대한 국가 건설을 위해 그때까지 소홀히 했던 서역지역을 차지하려 애썼다. 실크로드 무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국익을 증대하는 게 목표였다. 서역에 있는 나라들은 불교를 숭상했다. 젊은 승려 현장은 불경에 심취해 그 발상지인 인도에 가고 싶었다. 권력자의 생각은 무엇일까. 존경받을만한 인물을 통한 정보 수집과 활용일 것이다. 현장 또한 이러한 권력자의 생각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집필한 ‘대당서역기’를 보면, 나라마다 필요한 정보가 상세하게 적혀있다. 불경을 구하러 가는 승려가 자신이 직접 본 나라뿐 아니라 전해들은 나라들까지 자세하게 기록해야하는 까닭이 정녕 있는가. 현장은 기록한 정보를 곧장 상인들에 주어 장안으로 전하게 했다. 왜 그랬을까. 의구심은 또 있다.

현장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번역하면서 명성이 높아졌다. 그전까지는 한낮 학구열 넘치는 젊은 승려였다. 당시 장안 인구는 250만명이었다. 엄청 많은 수다. 이런 상황에서 현장이 제국의 국왕에게 늘 관심의 대상이었을까. 현장의 다음 글 역시 인도까지의 여행 중에 그가 해야 할 임무는 아니었을까.

‘실로 그곳의 땅에는 삼황오제시대 이상으로 천자의 은혜가 미치고 있었으며, 살아있는 것 모두 화락한 은혜를 입고 있었으니, 말을 할 수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천자의 공적을 칭송하지 않는 곳이 없다. 중국으로부터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천축에 이르기까지 변경의 이민족, 절역의 나라들에서조차도 모두 대당력을 받아서 한 결 같이 천자의 덕화를 입고 우리의 무공과 문덕의 성대함을 찬미하여 으뜸가는 화제로 삼고 있다.’

승리자의 역사엔 필연만 있다

역사에서 우연은 없다. 역사가가 채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채택된 역사에 우연이 있다면 그것은 필연으로 전화(轉化)된다. 하늘의 뜻을 대신할 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필연도 우연으로 전화된다. 하지만 역사가에 의해 역사 밖으로 사라진다. 승리자의 역사에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인간사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는 우연일진대 그 연결고리는 항상 필연인 것인가. 작렬하던 태양도 사막 너머로 저문다. 온 하늘에 마지막 불길을 쏟아낸다. 석양을 바라보며 확신한다. 만남은 우연이고 이별은 필연이라는 것을.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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