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동생과 마당 한 가운데 있는 사철나무 아래로 기어들어왔다. 이 나무는 혼자 과자를 먹을 때 올라가는 나만의 비밀장소다. 나무 위에 올라가면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똑같은 과자도 훨씬 맛있다. 이 사실을 엄마가 안다면 “여자애가 드세게 뭐하는 짓이냐”고 혼을 내겠지만 아직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특별히 오늘은 동생과 함께 하기로 했다. 엄마가 외출하기 전에 쥐포튀김을 해놓았다. 이렇게 맛있는 걸 밋밋하게 방 안에서 먹을 순 없다. 게다가 ‘집안에서 얌전히 먹으라’며 찬물을 끼얹을 어른도 없다. 양손에 튀김을 쥐고 있어 나무를 탈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초등학교 2학년인 동생은 나와 세 살 터울이다. 극성스런 나와 달리 동생은 여리고 섬세하다. 이런 동생을 골려먹을 때도 있지만 다양한 놀 거리를 제공해주는 사람 또한 나였다. 이번에도 동생은, 단지 나무 아래에 쪼그려 앉아 튀김을 먹을 뿐인데도 무슨 비밀작전이라도 수행하는 양 즐거워했다. 이 공간을 발견한 것이 얼마나 은밀하고 대단한 일인지, 순진한 동생에게 맘껏 으스대며 쥐포튀김을 뜯었다.

그때였다. 대문 아래 빈 공간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아까 대문 닫는 걸 깜박한 것이 생각났다. 자책할 새도 없이 두툼한 발 네 개가 성큼 대문턱을 넘어섰다. 낮은 회양목에 가려 몸통이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알겠다. 저건 우리 동네에 딱 한 마리밖에 없는, 검은 대문 집의 불도그였다.

▲ ⓒ심혜진
검은 대문 집에는 노인 부부가 살았다. 그들은 이웃과 거의 왕래하지 않았다. 불도그는 늘 높은 담 안에서 줄에 묶여 있다가 지나가는 행인을 향해 컹컹 울부짖었다. 그 소리가 금방이라도 담벼락을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사나워서, 다들 그 집 앞을 지나가기를 꺼렸다. 그 개가 동네 떠돌이 개를 물어 죽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검은 대문 안쪽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그 개의 두툼한 발과 검은 코는 동네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발 네 개가 회양목을 돌아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불도그는 내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축 늘어진 눈과 볼에서 핏물이 배어나올 것 같았다. 개가 내 입 주변에 코를 바짝 대고 킁킁거렸다. 쥐포튀김 냄새를 맡고 있는 듯했다. ‘개는 가만히 있는 사람을 물지 않는다’는 말을 믿고 싶었다. 나는 최대한 입을 움직이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어”라고 동생에게 말했다.

그 순간, 불도그가 펄쩍 뛰어올랐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도그가 내게 정신이 팔린 사이, 겁에 질린 동생이 나무 아래를 빠져 나갔다. 불도그는 그 뒤를 바짝 뒤쫓고 있었다. 동생은 집 뒤쪽으로 도망쳤다. 나는 잽싸게 집 안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열어 놓고 동생을 기다렸다.

집을 한 바퀴 돌아 동생이 나타났다. 얼굴색이 잔뜩 새파래진 채 지금 어디를 향해 뛰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동생에게 “얼른 이리 들어와!”라고 소리치려했다. 그런데 바로 뒤에서 세상을 집어 삼킬 듯한 기세로 불도그가 쫓아오는 걸 보고는 열었던 문을 나도 모르게 닫아버렸다. ‘이번엔 꼭 동생을 들어오게 해야지!’ 두 번째 바퀴를 돌고 나온 동생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문을 열지 못했다. 세 바퀴를 돈 동생은 지쳐보였고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네 바퀴 째, 동생은 아예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동생을 구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대문 밖으로 나가려했지만 그럴수록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던, 불도그의 퀭한 눈이 자꾸 생각났다. 나는 현관문을 꼭 닫아걸고 중얼중얼 동생을 위한 주술만 외웠다.

잠시 후 대문으로 동생이 들어왔다. 얼굴은 눈물 자국 범벅이었다. 공터를 한 바퀴 돌았을 때 동생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단다. 눈앞이 아찔하던 그 순간, 불도그는 동생의 입 주변을 몇 번 킁킁대더니 저만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신나게 한 판 잘 놀았으니 아무 미련 없다는 듯이.

나는 먹다 남은 쥐포튀김을 아직도 손에 쥐고 있단 걸 알았다. 마당 한 쪽 퇴비장에 휙 던져 버리려다 이 냄새를 맡고 불도그가 다시 찾아 올까봐 땅에 파묻었다. 나는 동생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부모님께 말하지 말라고 했다. 동생은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그날 저녁, 엄마가 현관문 손잡이가 온통 기름투성이인 걸 발견하곤 누가 이랬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차례 문손잡이를 붙들고 열지 못하는 꿈을 꾸었다. 차라리 동생과 함께 개에게 쫓기는 꿈이었다면 덜 비참했을까? 그 나무 아래에서 뭔가를 먹은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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