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평론] 기사단장 죽이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7.12.

한여름 밤에는 역시 소설 읽기가 최고다. 더위에 지치고 일에 치여 피곤할 때 만사 제치고 소설을 읽고 읽노라면, 이야기 세계에 자맥질해 온갖 세상사 잊어버리게 된다. 이번 여름은 큰 비가 자주 와 습도가 높은지라 더 힘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잠들기 전에 책을 읽었다. 졸음을 물리쳐가며 소설을 읽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더위와 피로를 이겨내고 싶었던 셈이다. 그래서 든 책이 화제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하루키는 복도 많다. 남의 나라에서 출간부터 화제가 되고,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오르니 말이다. 먼저 읽은 이들이 여기저기 글을 써놓기도 해 내용은 대강 알고 읽었다.

감상부터 말하면 평년작이었다. 하루키 작품의 두 계열, 그러니까 일반적인 서사양식과 환상성을 적절하게 버무려 이야기를 끌고나갔다. 워낙 명민한 작가라 자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잘 알고 이야기 곳곳에 그 요소를 배치해놓았다. 다른 작품과 달라졌다면, 클래식과 고급 자가용에 관한 박람강기(博覽强記)를 자랑했다는 점, 변하지 않은 것은 읽다 지겨워질 무렵 성애 장면을 배치하는 기법이었다.

 
이 작품에 나온 역사배경에 대해 일본 우익이 거칠게 항의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지나친 반응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일본 우익의 반응에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다 싶었다. 단, 전제가 있다. 만약 하루키가 이 작품에 나온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려고 집요하게 매달리고, 일본에 만연한 그릇된 역사의식에 정면으로 맞섰더라면, 이라는. 만약 그렇게 썼더라면 하루키의 영향력을 감안하건대 일본 우익이 심각하게 걱정할만한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겠다는 말이다.

두루 알려졌다시피, ‘기사단장 죽이기’에는 두 가지 사건이 배경으로 깔렸다. 그 하나는 유명한 일본 화가인 아마다 도모히코가 겪은 일이다. 젊을 적 빼어난 서양화가였던 그는 빈으로 유학을 갔는바, 거기에서 나치 고관 암살사건에 연루돼 일본으로 강제 소환된 적이 있다. 제목인 ‘기사단장 죽이기’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를 모티브로 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 도모히코의 미발표 일본화다.

또 다른 사건은 도모히코의 세 살 아래 동생인 쓰구히코 이야기. 동경음악학교에 다니던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행정 실수로 중국에 파병돼 난징 학살에 가담하게 됐다. 주변의 강요로 반인륜적 행위를 저지른 그는, 일본으로 돌아와 당시의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했다.

이야기의 흡인력도 좋고,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가는 문장도 좋았지만, 나는 ‘기사단장 죽이기’가 주제의식을 돋을새김하지는 못했다고 평가한다. 일본의 정치지형도가 하루키를 압박했을까? 그는 스스로 내세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미봉한다. 상징은 너무 상투적이고, 피츠제럴드에 대한 오마주는 너무 노골적이다. 나는 하루키가 일본의 트라우마에 건 샅바를 끝까지 놓치지 않았더라면, 대단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쉬웠다. 그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래서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모양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다 읽을 무렵,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를 찾아놓았다. 누군가 페이스북에 하루키와 이문열이 동갑이라는 글을 올려놓았다. 물론 하루키를 칭찬하기 위해서였다. 여전히 대중과 호흡하는 하루키에 비해 이문열은 대중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그 글을 보니 갑자기 ‘황제를 위하여’를 읽고 싶었다.

이 작품은 정감록을 믿는 일군의 집단이 국가를 건설하고 통치했던 상황을 때로는 진지하게, 가끔은 해학적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더욱이 이 작품이 1980년에서 82년 사이에 연재됐다는 점에서 이문열의 문재(文才)를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30대 초반에 이 정도의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룬 작품을 발표했다는 것은 상찬할만하다. 그런데 이문열은 왜 지금 독자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할까? 나는 그가 ‘황제를 위하여’에서 보여준 노장적 태도마저 지켜내지 못한, 이념적 퇴화에 그 원인이 있지 않나 싶었다.

참으로 작가로 살아가기는 어렵구나. 정면으로 맞서지 못해도, 자신이 한때 높이 쳤던 가치를 지켜내지 못해도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 지겨웠던 여름도 이들 덕에 잘 넘겼나니, 이야기의 힘은 여전하도다!

/이권우(도서평론가) 시민기자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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