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간] 어르신을 위한 작은도서관 ‘춤추는 달팽이’

▲ 최선미(맨 오른쪽) 관장이 할머니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준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하얀 눈송이 같은 옥수수 뻥튀기 아작 씹으면 사르르 녹아서 목구멍으로 꼴깍.
“할머니, 이 뻥튀기는 어디서 샀어요?”
“사긴, 여름이면 딱 한 번 열리는 옥수수를 잘 말려 놓으면 뻥튀기 할아버지가 맛있게 튀겨 주지!”

9월 6일 오전 10시, 열 명 정도 돼 보이는 할머니들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마주보고 앉아 모두 한 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표정들이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아련해 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할머니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그 한 쪽에 한 여성이 서서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다. 그림책(할머니에겐 뭔가 있어!, 신혜원 지음, 사계절) 주인공인 할머니와 아이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작은도서관 풍경치고 낯설다. 작은도서관 하면, 아이들과 엄마들을 떠올리는 건 선입견일까.

도서관을 둘러보면, 이 낯선 풍경이 어디서 연유했는지 알 수 있다. 책꽂이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큰 글씨 책’ 코너와 창가 쪽에 놓여 있는 탁자 위의 확대경과 돋보기안경들이 ‘어르신을 위한’ 작은도서관임을 말해준다. 할머니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준 이는 이 도서관의 관장인 최선미씨다.

느릿느릿한 달팽이가 춤을 춘다고?

▲ 최선미 관장.
이 도서관의 이름은 ‘춤추는 달팽이’. 느릿느릿한 달팽이가 춤을 춘다고? 재미있고 호기심을 자아낸다. ‘어르신을 위한 작은도서관’ 이름으론 ‘깔’맞춤이다.

최선미씨는 지난 6월까지 부평구 산곡동 영아다방사거리 근처 도깨비시장 골목에 있던 달팽이미디어도서관 관장이었다. 2011년, 지금은 사회적기업인 모씨네 사회적협동조합(옛 인천여성영화제) 대표인 최주영 전 관장한테서 물려받았다. 달팽이미디어도서관의 전신도 있는데, 2005년 청천동 대우푸르지오 아파트 근처 상가 건물에 개관했던 달팽이어린이도서관이다.

달팽이미디어도서관은 작은도서관의 일반적 기능 외에 영상을 매개로 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대표적인 게 ‘아줌마들의 바람난 카메라’다. 책을 영상으로 만들어 보여주거나, 촬영한 영상들을 책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식이다. 최선미씨는 미디어도서관의 명맥을 이으면서도 마을공동체 활동에 힘을 많이 쏟았다. 달팽이미디어도서관이 속한 인천작은도서관협의회의 지원으로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북스타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그 과정에서 만난 엄마들과 책모임을 꾸려 운영하고, ‘골목시장 탐험대’라는 제목으로 시장 상인들과 인근 초등학교를 연계한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이랬던 최씨가, 아직도 옛 달팽이미디어도서관 근처에 살면서 왜 ‘춤추는 달팽이(인천도시철도1호선 부평삼거리역 3번 출구, 신명빌딩 2층)’ 관장으로 왔을까.

먼저 밝히면, 최씨는 어르신을 위한 도서관을 만들어 운영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 공간(=달팽이미디어도서관)에 10년간 있었다. 5년 단위 임대차계약을 두 번 맺었다. 월세가 50만원이니, 시세보다 훨씬 쌌다. 그런데 주변 재개발 등으로 변화가 생겼다. 건물 주인도 더 이상 싸게 임대하기는 어려워 인상을 바라셨다. 약 100평 공간을 지역아동센터와 나눠 사용했는데, 두 곳 다 주민들 후원으로 운영하느라, 건물 주인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는 실정이었다”

최 관장은 달팽이미디어도서관이 마을 속에서 주민들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그게 마을공동체를 가꿔나가는 데 기여한 게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 어떻게 해서든 새 공간을 마련하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문제는 돈이 없는 거였다. 보증금 5500만원 중 도서관 몫은 400만원뿐이었다. 다시 모으기엔 힘이 없었다. 마을에 작은도서관이 필요하지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달팽이미디어도서관은 부평구의 작은도서관 평가에서 몇 년간 최우수 평가를 받았다. 부평구에서 작은도서관의 상징이라고 할 정도였다.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이렇다 할 도움이 없었다. 운영을 아무리 잘해도 이렇게 되면 닫는 거구나, 하고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이제 무엇을 할까 고민할 때, 사단법인 지역복지센터 ‘나눔과함께(이사장 한상욱)’에서 법인 사무국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최 관장은 ‘그러면 작은도서관을 가지고 들어가겠다’고 역으로 제안했다.

“달팽이미디어도서관이 마을에서 한 역할을 고집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나눔과함께가 독거노인이나 생활에 어려움 겪고 있는 노인들을 위해 일하는 곳이니, 작은도서관이 들어가 책으로, 책 관련 프로그램으로 노인들을 정서적으로 지원하고, 문예활동도 지원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은도서관들의 역할이 같을 필요는 없다

▲ 어르신들을 위한 큰 그림책과 큰 글씨 책 코너.
그렇게 결정하고, 달팽이미디어도서관에 있던 책과 책꽂이 등을 나르고 새 둥지를 틀어 이달부터 운영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어르신을 위한 도서관으로, 도서관의 성격과 기능을 전환하기로 한 것이다.

“달팽이어린이, 달팽이미디어 도서관 12년 역사를 버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르신을 위한 작은도서관 의 이미지와 기능을 천천히 만들어가자고 했고, 내부 토론과 공모,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활용한 투표로 도서관 이름을 ‘춤추는 달팽이’로 정했다. 늙었다고 우울하고 힘이 없다고 할 게 아니라, 즐겁고 신나게 남은 생을 살아가자는 의미로 그렇게 정했다”

작은도서관이 전국적으로 6000개가 넘고, 인천엔 212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을 닫고 생기고를 반복한다. 최 관장은 공공도서관이 하는 서비스를 작은도서관이 똑같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지역 특성과 이용자 특성에 맞게 작은도서관을 특성화하는 게 의미가 더 있겠다고 여겼다.

“어르신을 위한 작은도서관이라고 했지만, 노인이 아니어도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어르신들의 눈높이에 맞춘 책과 장비 등, 도서관 환경을 고민했다. 큰 활자 도서들을 구비했는데, 엄청 비싸다. 부평구에서 작은도서관에 지원하는 연간 500만원 중 200만원을 책 구입하는 데 써야 하는데, 200만원 모두 큰 활자 책을 구입하는 데 썼다. 그런데 구입한 게 20권도 안 된다. 시중에서 판매하지 않아, 주문 제작해야한다. 한국도서관협회가 큰 활자 책 지원 공고를 해 연락했더니, 공공도서관에만 지원한단다. 공공도서관을 통해 지원 받을 수 있는 통로를 찾고 있다. 또, 그림책은 어린이만을 위한 책은 아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주인공인 책을 선별해 남겨놓았고, ‘나이 듦’을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책들도 구비했다”

최 관장은 달팽이미디어도서관에 있던 도서 약 1만 2000권 중 4500권 정도만 선별해 이곳으로 가져왔다. 어르신들을 위한 책도 있지만, 어린이나 일반 성인들이 읽을 만한 책이 더 많다. 이뿐 만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책도 눈이 어두운 어르신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래서 돋보기안경과 확대경도 몇 개씩 마련했다. 아울러 도서관에서 꽃 책만 봐야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어르신들이 향수에 젖을 수 있게 레코드판 턴테이블과 옛 가요나 팝송, 재즈가 담긴 레코드판도 마련했다. ‘턴테이블은 있는데 레코드판이 없다’고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한 분이 100장 넘게 기증했다.

가만히 있으면 오지 않는다

▲ 확대경과 돋보기안경, 레코드판 턴테이블을 마련했다.
그런데 노인들이 이 공간을 얼마나 찾을까? 거동도 불편할 텐데.

“어느 작은도서관이든 가만히 있으면 이용자들이 오지 않는다. 달팽이미디어도서관에서 진행한 육아 대상 책 프로그램, 골목시장 탐험대, 엄마 성장 프로그램, 엄마들의 책모임처럼, 어르신을 위한 도서관에 맞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우선 50대, 즉 앞으로 10년 후 내 삶을 고민하는 중장년을 모아 같이 고민하고 준비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이 도서관에 요구하는 것들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일반 작은도서관 개관 기념행사에 그림책 작가를 주로 초청하는데, 어르신을 위한 도서관에 걸맞게 강연 주제를 ‘나이 듦을 행복하고 즐겁게 맞이할 수 있는 방법 찾기’로 정했다. 웰 다잉, 도시에서 죽는 다는 것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생을 마감하는 게 좋은지 수강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함께 고민하자고 제안할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모임으로 이어질 것으로 본다”

‘춤추는 달팽이’ 개관 기념 강연은 13일 오후 7시에 열린다.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의 저자 김형숙 순천향대학교 간호학과 교수가 강의한다. 대학병원 중환자실 간호사로 일하면서 겪었던 일들과 생각, 생명윤리학을 공부하면서 ‘어떻게 존엄하고 품위 있게 이별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들려줄 것으로 보인다.

최 관장은 어르신들을 도서관으로 이끌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 중이다. 작은서관에 그냥 책 보러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걸 다년간 활동으로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엔 법인(=나눔과함께)이 수행하는 재가노인요양서비스 활동으로 오시는 분들이 있다. 특화프로그램으로 우크렐라, 꽃꽂이, 그림그리기, 소품 만들기 등을 운영하는데, 책과 접목할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아까 특화프로그램 앞풀이로 그림책을 함께 읽은 것처럼 말이다. 개관 기념 강연처럼 예비노년을 위한 고민과 활동에 집중할 생각도 하고 있다. 모임을 운영해보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 같다”

최 관장은 지난 6월부터 연수구 청학도서관에서 운영하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자서전을 그림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삶을 나누고 정리하기 위함이다. 웰 다잉과 맞닿아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참여해봐야 벤치마킹이 가능하다. 12월까지 일주일에 한 번 매주 목요일마다 진행한다.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고, 당시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그림과 글로 표현해 나중에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하는 거다. 내가 살아온 삶을 무겁지 않게 기쁘게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자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없는 분들이 많다. 그걸 도서관에서 열어주면, 좋은 역할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최 관장은 개관 행사 준비로 바쁘다. 강연회에 이어 20일엔 개관식도 한다. 강당이나 마당이 없어 다수가 집중하는 행사는 못한다. 하루 종일 아무 때나 오는 손님을 맞이할 계획이다. 최대한 따뜻하게, 정성을 다해 맞이하기 위해 손수 제작한 책갈피를 나눠주고, 타로로 운세를 봐주기도 할 예정이다.

최 관장은 직장을 다니다 작은도서관에 뛰어든 뒤 인생관이 바뀌었다고 했다. 비록 월급여가 20만~30만원 정도였지만, 즐기는 삶에 만족했다. 특히 작은도서관 일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창의적인 사람이었구나, 내가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었구나’를 깨달았고, 하는 일이 재미있으니 다음 일도 도모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의 긍정적 에너지가 ‘춤추는 달팽이’에서도 뿜어져 많은 어르신들을 춤추게 하길 바란다.

한편, ‘춤추는 달팽이’는 월~금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용할 수 있으며, 도서 대출도 가능하다.(문의ㆍ032-526-5204)

▲ 확대경을 이용하면 작은 글씨도 크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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