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버스 안에서 나는 울고 있었다. 사람들이 쳐다봤겠지만 그런 건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조금 전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지병이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사인은 심근경색이었다. 향년 59세, 이별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다.

장례를 치른 후 3일 째 되던 날, 유골을 모신 가족공원에서 삼우제를 지냈다. 아빠의 유품도 정리했다. 망자가 떠난 후에도 일상이 흐른다는 게 낯설고 어색했다. 여전히 혼란과 슬픔에 빠져있을 때 문자 한 통이 왔다. 친구 어머니의 사망 소식이었다. 며칠 전 장례식에서 만났을 때도 별다른 얘기가 없었는데, 너무 이상했다.

다음 날 장례식장에서 친구를 만났다. 많이 울었는지 퀭한 모습이었다. 함께 간 친구들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주일 사이에 이게 무슨 일이냐” 친구들이 안타깝고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잠시 후 그 애가 왔다.

▲ ⓒ 심혜진.
그 친구가 해준 이야기는 이랬다. 지방에서 회사를 다니던 친구는 우리 아빠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그날 오후 월차를 내고 올라왔다. 문상을 마치고 서울에 있는 본가에서 잠을 잔 후 다음 날 새벽, 첫 차를 타고 다시 내려갔다. 그런데 그저께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단다. 엄마가 열이 많이 나서 병원에 가셨다고. 그때만 해도 큰일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부랴부랴 서울에 올라왔을 때, 엄마는 이미 혼수상태였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돌아가셨다. 사인은 급성 바이러스 감염이었다.

“너희 아빠 장례식 아니었으면 엄마랑 인사도 못하고 보내드릴 뻔했다. 그런데…” 그 애가 울먹였다.

아빠 장례식에 왔던 날, 첫차를 타기 위해 알람을 맞춰 놓고 혹시 몰라 엄마에게 깨워달라고 부탁했단다.

그런데 엄마는 아들이 좀 더 잤으면 하는 생각에 제 시간에 깨우지 않았고, 늦게 일어난 그 애는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차를 놓칠까 후다닥 뛰어나가야 할 형편이었다. 겨우 눈곱만 떼고 구두에 발을 구겨 넣는 친구에게 엄마가 “잠깐만! 이거 가져가” 하더란다. 비닐봉지에 든 건 삶은 계란 두 개. “계란은 무슨 계란이야. 늦었단 말이야” 친구는 잔뜩 짜증을 내고 돌아섰다. 엄마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혜진아, 너희 아빠랑 우리 엄마랑 하늘에서 친구하시면 되겠다” 그 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앞으로 다시는 삶은 계란을 먹을 수 없을 거라던 그 애. 그 심정이 천 번 만 번 이해가 간다. 어머니가 건네주려던 그 계란은 참 따뜻했을 것 같다. 어쩌면 친구도 엄마가 전하려던 따뜻함을 지금쯤 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아빠를 생각하며 죄책감보다는 고마움을 느끼는 것처럼 그 친구도 그랬으면 좋겠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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