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람] ‘인천 일제강점기 징용노동자상’ 제작한 이원석 조각가

일제강점기에는 조병창이, 해방 후에는 애스컴(ASCOM. 부평미군기지)이 있었던 부평공원이 ‘역사바로알기’ 현장으로 변모했다. 지난해 10월 29일 ‘인천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진 데 이어 지난 8월 12일 ‘인천 일제강점기 징용노동자상(이하 인천징용노동자상)’이 세워져 공원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인천징용노동자상은, 올해 2월 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한 후 몇 차례 역사 강연과 기행, 세미나를 거쳐 건립됐다. 건립기금 1억 6000만원을 모으는 데 시민단체들과 시민 900여명이 동참했다.

지난 21일, 인천징용노동자상을 제작한 이원석 조각가를 그의 작업실이 있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만났다. 이씨는 이 작품에 ‘해방의 예감’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1945년 8.15 해방은 연합군의 원자폭탄 투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싸워온 것이 쌓여 가능했던 것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명명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이야기는 진지했고,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동상이 아닌 기념비를 만들고 싶었다

▲ 지난 12일 부평공원에 세워진 인천징용노동자상을 시민들이 쳐다보고 있다.
“올해 2월 중순에 지인한테서 제안서를 받았어요. 3월 초까지 모형을 제출해야하는데, 제안서 몇 장을 보고 작품을 만들기에는 너무 부족했습니다. 책이나 자료를 찾느라 실제 작업한 기간은 밤을 샌 5일밖에 안 됩니다”

이 작가는 역사적인 작품을 다루는데 그냥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부평의 역사에서부터 징용과 일본군‘위안부’ 등, 다방면의 공부가 필수라 생각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연형’과 ‘지영례’라는 실제 인물 두 명을 찾았다.

“일제강점기 말기라는 시간과 조병창이 있던 부평이란 공간을 가로지는 정체성을 정의 내려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기된 미션은 ‘동상’이었지만, 역사의 무게가 있어서 ‘기념비’로 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죠”

동상(銅像)의 한자풀이는 ‘청동으로 만든 인물상’이고, 인천징용노동자상 건립추진위원회의 의도는 ‘일제강점기 노동자를 주제로 한 동상 제작’이었다고 말한 이 작가는 “그러나 단순한 동상 제작이 아닌, 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했다”고 강조했다. 그 시대의 ‘위안부’ 이야기, 조병창 이야기, 징용 이야기를 담으려면 단순한 동상일 수는 없다는 게 그의 마음이었다.

건립추진위가 이 작가에게 준 자료 중에 조병창에서 겪었던 일을 증언한 지영례 할머니의 얘기가 있었다. 이 작가는 그것을 근거로 여러 자료나 동영상을 검색했다. 조병창 의무대에서 일했던 지 할머니는 다친 사람, 특히 팔이 잘린 사람을 부지기수로 봤다고 증언했다. 그때 할머니의 나이는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갔던 소녀들과 비슷했다.

2009년에 고인이 된 이연형 할아버지는 조병창에서 일하면서 무기를 빼돌려 독립군 활동을 돕고 무기 제작을 배우기도 했다는 자료가 있다. ‘징용’은 ‘강제로 동원됐다’는 수동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 작가는 그 속에서도 우리 민족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았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고도 했다. 이 할아버지는 독립군을 돕는 활동으로 조병창에서 쫓겨난 후에도 조선 독립을 위한 활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훗날 독립유공자로 지정됐다.

“우리 민족에게는 독립과 해방에 대한 의지와 정서가 있다고 봅니다. 그 근거가 4.19혁명,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7년 민주항쟁, 작년의 촛불집회가 아닐까요? 1945년 8.15 해방이 연합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인한 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저항의지가 바탕이 됐다고 봅니다. 그걸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작품 제목에도 그걸 담고 싶어 ‘해방의 예감’이라 지었고, 두 인물의 포즈에도 녹여내려고 했습니다”

이 할아버지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는 게 없어, 이 작가는 40대 남성으로 표현했다. 마른 체구지만 눈과 코, 입에 저항의 이미지를 담으려고 했다. 남성과 손을 잡은 여성상은 지 할머니의 모습을 담았다. 조병창에서 찍었던 사진을 참고했고, 당시 할머니의 마른 모습과 단발머리를 차용했다.

무한복제 아닌, 공간과 시대를 반영한 작품이어야

▲ 이원석 조각가.
이 작가는 이 작품을 만들면서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몇 년 전 이 작가가 부산에 세운 ‘평화의 소녀상’ 때문이다.

“예술가들 사이에서 ‘소녀상’을 그만 만들자는 얘기도 합니다. 일본군 성노예인 ‘위안부’를 표현한 소녀상은 역사를 반성하는 의미를 담아야하는데 그냥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기 때문이죠. 소비구조에 대해 검증해야한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이 작가는 소녀상의 문제라기보다 무한 반복해 복제하는 것에 대해 과연 ‘위안부’에 대한 얘기를 소녀상이 제대로 담아낼 수 있을까라는 우려와 자성의 목소리라고 부연했다.

“수요집회를 하는 장소인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은 큰 역할을 했어요. 그런데 그 후에 한반도 남쪽에 소녀상들이 계속 세워지는데 그 지역의 할머니들에 대한 삶의 얘기나 반성과 기억 등에 관한 내용이 없이 예전의 것이 반복되고 있는 거 같아요. 여러 가지 방식을 이용해 반복되지 않는 기념비가 돼야합니다”

몇 년 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1세대 활동가였던 사람이 이 작가에게 전화했다. 부산에 소녀상을 세우려고 그에게 의뢰한 것이다. 이 작가는 처음엔 거절했다. 일본군‘위안부’의 비극과 사연을 담기에는 소녀상이 너무 부족하다는 게 이씨의 생각이었고, 의뢰인은 소녀상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했다.

“세우고도 반성이 됐어요. 부산이라는 지역에서 벌어졌던 할머니들의 기억과 활동 등, 투쟁을 담고 싶었는데 못했어요. 인천징용노동자상도 전국적으로 뿌리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소녀상처럼 무한 복제되는 것에 반대합니다”

인천징용노동자상 제막식이 열린 날 서울 용산에서도 징용노동자상 제막식이 열렸다. 이씨의 말로는, 올해 10월까지 부산이나 경남 창원, 울산, 제주도 등에서도 징용노동자상을 세우기 위해 추진 중이다.

“소녀상이든 징용노동자상이든 지역 역사와 더불어 만들어져야합니다.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이 더 많은 문화적 고찰이 필요해요. 빨리하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델과 빙의되는 과정이 보람됐다

▲ 실제 인천에 살았던 이연형 할아버지와 지영례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해 제작했다.
이 작가는 기념비 주인공으로 두 명을 정하고 나니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됐다고 했다. 또한 본인이 주인공으로 빙의가 돼 포즈를 취하고 정서를 느꼈다고도 했다.

“서로 모르는 사이인 이연형 할아버지와 지영례 할머니를 하나의 작품으로 엮으면서 어떤 포즈를 취해야하는지, 두 분과 정서를 공유하는 과정에 고민이 많았지만 즐거웠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기념비나 동상은 대부분 상징으로 끝나다보니 보는 사람 입장에서 상상하는 과정이 제한됐어요. 이번에는 상상하면서 작업했고, 보는 사람들도 상상할 수 있게 했습니다. 부조의 경우도 두 사람의 경험을 하나의 서사로 묶어서 기승전결로 풀어갔습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해방된 이후의 역사까지 한 권의 소설이나 한 편의 연극처럼 담았습니다. 만들면서 감정이 이입돼 재밌기도 했고, 역사를 기반으로 한 기념비 작업에서 작가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하는지 고민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지영례 할머니는 직업이 없는 어린 여성을 성노예로 끌고 간다는 얘기를 듣고 조병창으로 도망치듯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이 작가는 ‘위안부’, 조병창, 징용 얘기는 연관될 수밖에 없고 포괄적이고 역사적인 한반도 전체의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고(故) 이연형 할아버지를 통해서는 징용된 노동자들의 현장이야기, 해방과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현하려했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얘기를 묶으니 드라마가 됐다고 했다. ‘위안부’나 징용으로 끌려간 소녀가 느꼈을 놀라움과 두려움, 조병창 안에서 벌어진 노동쟁의나 독립군 활동 이야기, 공습 등이 늘어나면서 표정이 어두워지는 일본인들, 그럴수록 해방을 꿈꾸는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함께 묶었다.

“이런 얘기들을 주인공 두 명만의 얘기로는 맥락이 안 느껴질 수 있어요. 부평공원을 오가며 느낀 건 공원에 오는 사람들은 동네 사람들인데 인근에 있는 ‘삼릉’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어요. 결국 이들이 기념비를 볼 대상일 텐데 이게(=징용노동자상) 세워져있는 이 땅이 미쯔비시가 소유했던 적산의 땅이자 친일파인 송병준과 민영환의 손을 거쳐 간 역사의 땅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뒤에 이걸(=부조) 놓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이게 있어야 쉬우면서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든 자기방식으로 풀고 싶은 우리 근현대사

▲ 동상 뒤 부조에는 징용과 ‘위안부’그리고 조병창의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표현했다.
1986년에 홍익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한 이 작가는 현실참여적인 작업을 하는 선배들의 영향으로 ‘미술과 사회적 실천’을 고민했다. 진보적인 예술 활동을 하는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하다보니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면서 작품 활동을 못했던 생활이 계속됐다.

“서른다섯 살까지 작업을 못했어요. 큰 애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는데 갑자기 이런 생활을 계속해야하나 회의가 들더라고요. 급성 충치가 생긴 것 마냥 며칠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그러다 힘들어도 작가로 사는 게 맞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 작가는 그 후 돈을 끌어 모아 지금의 작업장을 짓고 작품을 보관하는 곳도 마련했다. 그 때가 2002년이었다. 그러나 작업실을 장만하고 2년간 아무 것도 안 했다. 아니 못했다. 시간이 있다고 작업이 되는 건 아니었다. 창작을 끊임없이 해야 했는데 2년간 멍청하게 앉아 있으며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3년 후인 2005년 첫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본격적으로 작업했다. 고민하느라 잠을 못 자면서 작업했던 첫 개인전 작품이 아직도 가장 애정이 간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작업은 동학 등, 조선 말기 사건부터 한국전쟁까지의 근현대사를 조각이란 매체로 형상적으로 풀어보고 싶습니다. 그 시대의 자료가 부족하거나 왜곡돼있는 게 많아요. 상상력을 동원하고 예술적 감흥을 살려보고 싶어요. 역사에 관심이 많으냐고요? 한 많은 우리 역사를 접하면 안타까워서 누구든지 자기방식으로 풀어보고 싶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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