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강화역사문화센터장
원나라 순제라고 하면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고려와 깊은 관계가 있고, 몽골 침략에 따른 강화 천도에서 알 수 있듯 인천과도 관계가 꽤 깊다.

징기스칸은 물론이고 나라 이름을 원(元)으로 바꾼 세조 쿠빌라이도 어느 정도 알려진 반면, 혜종(惠宗)이란 묘호를 가진 원 순제는 미지의 인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어떤 여인의 이름을 말하면 자연스럽게 ‘아! 그 사람’ 할 것이다.

바로 기황후다. 고려의 공녀로 원나라에 가서 원 제국의 황후가 ‘되고야 만’ 여인이다. 황후는 황제의 부인이니 기황후에게는 남편이 있을 터인데, 그이가 원 순제다. 기황후 세력의 부상에 위기감을 느낀 순제가 황후 책봉을 망설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어쨌든 처음에는 고려 여인 기황후를 좋아하고 아껴서 가까이 했음은 틀림없다. 고려에 공녀로 가서 황실에 후궁으로 들어간 사례는 기황후 말고도 몇몇 여인이 있지만, 황후의 자리에 오른 것은 기황후가 유일하다. 그런 점에서 원 순제의 고려와 관련한 특별한 ‘인연’이 눈길을 끈다.

원나라 마지막 황제이자 명나라에 쫓겨 몽골고원으로 돌아가 북원(北元)이란 이름의 왕조를 연 시조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순제는 무척 어지러운 환경에서 일생을 보냈는데, 즉위하기까지도 평탄하지 못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행적이 바로 ‘대청도’ 유배다.

원 황실의 권력다툼에 휘말린 순제는 1330년 음력 7월 8일부터 이듬해 음력 12월 13일까지 1년 반가량 머나먼 고려, 고려에서도 절해고도(絶海孤島)라 해도 과언이 아닌 대청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1320년에 태어났으니 불과 11세쯤의 소년이었다. 대청도 유배는 소년 순제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 호기심도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고려 여인을 만나 사랑한 뿌리에 어쩌면 소년시절 고려 유배 경험에서 비롯한 또 다른 의미의 ‘향수(鄕愁)’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2013년 인하대박물관에서 발간한 보고서를 보면, 대청도에 남긴 순제의 흔적은 깊고도 넓었다.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 등, 조선 전기의 기록을 비롯해 동사강목이나 택리지 같은 개인 저술에도 대청도에 남은 순제의 흔적을 전하고 있다.

동사강목에는 푸른 옥돌로 만든 판을 기와로 쓴 순제의 궁궐 흔적이 대청도에 남아있다고 했는데, 대청초등학교 일대가 그 자리로 추정된다고 한다. 순제를 모셨다는 전설이 있는 성황당은 현재도 남아 있다. <동아일보> 1928년 8월 25일자에는 백령도 기행 중에 대청도를 들려서 찍은 ‘신황당’ 사진까지 실었다.

‘황제가 중병에 걸렸는데 유배 간 순제의 눈을 먹어야 낫는다’는 황후의 계략이 담긴 편지를 받고 자신의 두 눈을 뽑아 보냈더니, 순제의 유모가 자신의 젖에 담가두었다가 나중에 유배가 풀려 돌아온 순제에게 눈을 다시 넣어주었다는 황당한 전설도 남아있다.

서해 5도의 하나인 대청도에는 우리 역사가 경험한 여러 굴곡의 잔상이 남아있고, 원 순제 관련 유적과 전설처럼 새겨볼 유산도 적지 않다. 인천에서 섬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가는 반가운 상황이 섬이 가진 역사적 유산과 가치에 대한 이해로 심화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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