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배 노동자교육기관 회원.
한 후배가 밑도 끝도 없이 질문했다. “형, 내가 왜 10년 다닌 직장을 옮겼는지 알아?” 물어보고 바로 이어서 이야기를 했으므로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님을 알았다. “월급 받는 날 하루만 신이 나더라고” 내 대답은 간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잘 옮겼어. 10년 동안 애썼네” 듣는 사람에 따라 대답은 달랐을 것이다. 세대를 아우르는 취업난에 무슨 배부른 소리냐. 좋아서 하고 싶은 일과 돈 버는 일이 같을 수가 있겠냐. 또박또박 월급 받는 직장이 좋지 않겠냐. 조금만 참으면 진급할 텐데…. 다양할 것이다.

“그래 잘 옮겼어”라고 내가 답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 후배가 월급날 하루 빼고 한 달 30일 중 29일은 그전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았는지, 내 단순한 생각이 맞았다. 후배는 이렇게 얘기하고 씨익 웃었다. “월급은 좀 줄었어요”

행복하게 일한다는 건 어떤 걸까?

예를 들어 어렵게 직장을 구해 최저임금으로 시작하는 사회초년생들이 학자금 대출은 미뤄놓고 매달 30만원씩 저금한다고 가정해보자. 3년을 저금하면 1000만원을 모을 수 있다, 이렇게 30년을 저금해야 1억원을 모은다. 50세가 돼도 집 한 채 구하기가 어려운 게 지금 세상이다. 공공임대주택 비율이 어마어마하게 높아지면 모를까. 무언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돼있다. 내 스펙과 내 힘만으로는 잘 살 수 있는 세상은 더 이상 아니다. 극장에서 앞사람이 일어나서 영화가 보이지 않으니 뒷사람들도 줄줄이 일어서고 마는 세상임을 알지만, 어떻게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철학자이자 수학자이며 역사가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버트런드 러셀이란 영국 사람이 1935년에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을 썼다. 1935년이면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였고,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노동시간은 줄지 않던 때다. 찰리 채플린이 컨베이어벨트 공장에서 온종일 나사못을 조이는 일을 하다가 눈에 보이는 족족 조이는 영화 ‘모던 타임즈’가 1936년에 만들었다.

이 책은 영국 경제가 생산이 넘쳐 노동시간을 4시간으로 줄여도 되는 상황에서 ‘여가’ 없이 장시간 노동해야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필요 없는 ‘여가’로 고통 받는 실업자로 전락하는 세상을 꾸짖는다. 여기서 말하는 ‘여가’는 일에 지쳐서 집 치울 기운도, 아이랑 이야기할 힘도 없이 누워서 티브이 보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여가’라고 설명한다.

이 대목에서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 요즘 화두인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기술이 발달하고 산업자동화가 심해지면 일자리는 더 감소할 텐데, 최소생활비를 지원하는 기본소득 논의는 왜 잠잠한지 모르겠다.

안 되는 일이라고 그냥 놔두면 되는 게 없다. 지난해 10월 29일 시작해 토요일마다 일어났던 촛불집회는 올해 4월 29일까지 23차까지 이어졌다. 안 될 것 같았던 박근혜 즉각 퇴진이라는 구호를 걸었고, 촛불집회는 촛불혁명이 됐다. 87년 6월 항쟁에서 30년이 걸렸다. ‘여가’와 기본소득, 행복한 삶을 얻기 위해 또 모이고 모이면 되지 않을까. 이번엔 30년이나 걸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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