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남 성공회대 교수, (사)인천사람과문화의 ‘인천마당’서 강연

▲ (사)인천사람과문화가 주최한 53회 ‘인천마당’이 지난 24일 오후 8시, 부평아트센터 2층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김창남 성공회대학교 교수가 ‘나의 문화편력기’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대중문화평론가이자 대중문화연구가인 김창남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강원도 춘천에서 나고 자랐다. 어린 시절 책과 영화, 티브이(TV), 음악 등 재밌는 것이라면 어른들의 꾸중도 개의치 않고 흠뻑 빠져들곤 했다. 대중문화를 게걸스럽게 찾아다니던 꼬마는 어느덧 대중문화 전공자가 됐다.

김 교수는 지난 2015년 12월, 어릴 적 경험이 녹아있는 저서 ‘나의 문화편력기’를 출간했다. 편력(遍歷)이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여러 경험을 한다는 뜻이다. 유년기에서 사춘기를 거쳐 청소년으로, 다시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겪은 문화적 편력을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의 부제는 ‘기억과 의미의 역사’다.

김 교수는 지난 24일 저녁 부평아트센터 2층 세미나실에서 열린 (사)인천사람과문화의 53회 인천마당에서 강연했다. 책 제목 ‘나의 문화편력기’와 같은 주제로 1960~70년대 대중문화를 소개했다. 아래는 김 교수의 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960년대 라디오 전성시대

1961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미디어를 장악하고 미디어는 국민을 동원하면서 그 힘을 얻었다. 특히 그 시절에는 라디오 보급이 빨랐다. 문화 라디오(1961)ㆍ동아 라디오(1963)ㆍ동양 라디오(1964) 등, 라디오방송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TV 보급은 그보다 100배 빨랐다. 1961년 <KBS> TV를 시작으로 1964년 <TBC> TV, 1969년 <MBC> TV가 개국하며 박정희 군사정권은 미디어시스템을 정비했다.

박정희 정권은 매스미디어를 정권의 홍보수단이나 국민 통합 또는 동원의 수단으로 인식해 그에 맞게 미디어 법ㆍ제도를 정비하기도 했다. 베트남 위문공연이 끝나면 박정희는 박규석ㆍ구봉서ㆍ이미자ㆍ박재란 등 당대 최고의 스타를 불러 치하했다. 그 시절의 권력과 대중문화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또한 군사정권 권력자들은 연예인들을 술자리로 갑자기 불렀다. 권력자들이 연예인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의 단면이다.

▲ 1960년대 흥행했던 영화의 포스터들. 이때는 라디오 드라마가 잘되면 영화로 제작됐고, 영화 주제가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중요한 매스미디어인 라디오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노래도 들려주고, 뉴스도 나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라디오 연속극이 히트하면 반드시 영화로 만들어지고 영화 주제가가 인기를 얻었다. 그걸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라고 한다.

라디오 연속극을 통해 영화화된 장르는 신파조 멜로드라마다. 대표적으로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는 영화를 기억할 텐데 여러 번 리메이크됐다. 신파란 ‘슬프지만 남을 원망 안 하고 자기를 학대하는 것’을 말한다. 그게 핵심 코드다. 영화를 보고 다들 운다. 특히 여성들이 평소 힘들게 살다가 고무신 신고, 손수건 들고, 한복 입고 극장에 와 배우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면서 힘을 낸다. 그게 카타르시스다. 감정을 이입해서 자기감정을 쏟아낸다. 자기도 고달픈데 왜 슬픈 영화를 보냐면, 더 불쌍한 사람을 봐야 풀리기 때문이다. 1960년 그런 여성 관객을 ‘고무신 관객’이라고 불렀다.

당시 신파조 멜로드라마이자 ‘원 소스 멀티 유즈’인 작품들은 ‘동백아가씨’와 ‘섬마을선생’ 등이다. 대부분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가는 청년을 바라보는 농촌 처녀의 애조 띤 정서가 깔려있다. ‘맨발의 청춘’과 ‘하숙생’ 등은 도시의 청춘영화인데,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감정이 표현됐다. 농촌은 농촌대로, 도시는 도시대로 행복하지 않았다. 그 당시 대중의 정서였다.

외화와 어린이용 영화도 많이 봤는데, 이 시대가 영화의 전성기였다. 인구가 3000만명이었는데 누적 영화 관객이 2억명 가까이 됐다. 팝 스타일의 대중음악이 새로운 주류를 형성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키 보이스’와 ‘애드 훠’ 등의 록밴드가 출현했고, 1969년 클리프 리차드가 이화여대 강당에서 최초로 내한공연을 열어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했다.

▲ 김창남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1970년대는 일상과 문화가 억압받던 시절

1960년대 산업화로 고도성장이 이뤄지면서 미디어 산업도 발전해 대중문화시장이 커졌다. 60년대 소비자는 대부분 성인이었는데 70년대에는 학생들이 두터운 소비층을 형성하면서 그들을 대상으로 70년대 초에 청년문화가 생겼다.

60년대 포크 음악은 대부분 외국 번안 곡이었다. 한대수가 1969년 귀국해 자작곡으로 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하면서 공연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싱어송라이터였다. 그 후 1971년 김민기가 음반을 내면서 싱어송라이터 문화가 확대됐다.

1973년 유신헌법이 발표되면서 일상생활에 억압이 심해졌다. 대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고 그럴수록 박정희 정권은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 등으로 병영사회를 만들려했다. 1975년에 발생한 대마초 파동도 같은 흐름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대마초로 연예인을 구속하던 당시에는 그것을 단속하는 법이 없었고, 그 이듬해 법이 만들어졌다. 그런 게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220여곡이 금지됐다. 가사가 저속하거나 창법이 퇴폐적이라는 이유였다. 퇴폐적 창법으로는 여성가수의 경우 비음이 섞인다거나 남성은 허스키보이스의 샤우팅 창법 등이다.

가사를 문제로 삼은 것에는 송창식의 ‘왜 불러’와 ‘고래사냥’이 대표적이다. ‘왜 불러’는 장발을 단속할 때 “왜 불러”라고 건방지게 대꾸하는 게 공권력에 도전하는 가사라 판단했고, ‘고래사냥’은 당시 여당의 심벌이 황소인데 대학생들이 ‘고래’ 대신 ‘황소’라 바꿔 부른 게 문제라는 것이다. 신중현의 ‘미인’은 퇴폐적이어서, ‘거짓말이야’는 불신풍조를 조장한다는 게 정권의 생각이었다. 김영삼 정권 시절인 1994년 해금됐다. 해금을 결정하는 위원회에 나도 참가했다.

비틀즈의 음반이 수입되지 못한 적도 있었는데 표지에 마르크스 사진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밥 딜런이나 비틀즈, 퀸의 음악 중에도 불온하고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선정된 노래가 있다.

청년문화가 없어진 틈을 타 70년대 후반 대학가요제가 흥행하기 시작했고, 국민개창운동이나 건전가요 부르기, 국민교육헌장 등을 만들어 군대식으로 문화를 바꿔버렸다. 검열로 인해 70년대 영화는 급전직하로 망가졌다. 그 중 ‘별들의 고향’이나 ‘바보들의 행진’, ‘영자의 전성시대’가 남았다. 70년대 후반에는 임예진 등이 출연한 하이틴 로맨스 영화가 나왔다.

70년대 후반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가수는 최헌, 송대관 등이다. 밴드 사운드가 가미된 록 트로트 류였다. 심한 복고는 아닌 애매한 복원이었다. 송창식과 양희은이 사라지고 들을 게 없던 그때 방송에서 반복적으로 송대관의 ‘해뜰날’이 들렸다. 내 취향은 아니었는데 어느 날 내가 무의식적으로 부르고 있더라.

대중가요의 중요한 측면인 일상성과 반복성이다.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중에 나에게 문화가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인간은 모순적 존재다. 대중문화란 의식적 차원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무의식이나 욕망과 관련이 깊다. 그때 충격이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