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지기 친구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단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다. 집 주인의 독촉으로 급박하게 집을 구하고 이삿날을 잡았다. 이제 친구네 집에 가려면 두 시간 반 동안 버스와 전철을 타야 한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친구는 이삿짐을 싸는 일에 점점 지쳐갔다. 며칠 사이 통통했던 볼이 쏙 들어가 보기가 안쓰러웠다. 친구를 위해 이사 당일 아침 도시락을 준비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이럴 때 제일 좋은 건 유부초밥이다. 나는 유부초밥에 크래미와 오이피클을 넣는다. 잘게 찢은 크래미와 다진 오이피클에 마요네즈와 머스터드소스를 넣어 샐러드를 만든다. 유부의 절반은 샐러드로, 나머지는 밥으로 채운다. 겉에서 보면 밥만 넣은 것 같지만 먹다보면 상큼한 오이와 크래미가 씹힌다. 무심코 입에 넣었다가 의외의 맛에 눈이 동그래진다. 만드는 과정도 김밥 싸는 것에 비하면 일도 아니게 간단하다. 아, 크래미 샐러드에 양파를 다져 넣기도 하는데 나는 생양파를 좋아하지 않아 넣지 않는다.

이사 가는 날 새벽부터 비가 쏟아졌다. 도시락을 들고 집에 갔을 때 다행히 비가 그쳤다. 친구는 집 안에서 쓰레기를 정리하고 있었고, 친구의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여섯 살 된 여자아이다.

나는 그 애와 노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 애는 늘 자신이 대장이라도 되는 듯 내게 이래라 저래라 시키길 좋아했다. 그 애가 ‘빵’ 하고 총을 쏘면 나는 ‘으악’ 하며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쓰러져야한다. 한번 놀이를 시작하면 그 애는 웬만해선 멈출 줄을 몰랐다. 힘들 때 슬쩍 발을 빼기 위해 조카들에게 써먹던 방법도 그 애에겐 통하지 않았다. 조카바보로 10년을 산 터라 아이 대하는 법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그 애와 ‘노는 것’은 육체와 정신과 감정의 기운을 모조리 빼앗기는, 아주 극단의 ‘노동’이었다.

 
그 애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그 애가 친구에게 귓속말을 했다. “이모가 싸온 도시락 먹고 싶대. 아침을 안 먹었거든”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목장갑을 낀 친구 대신 내가 나무젓가락으로 유부초밥을 집었다. “자, 먹어 봐” 그 애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싫어. 엄마가”

친구가 장갑을 벗고 초밥을 먹였다.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 사이 초밥 반 개를 다 먹은 그 애가 손으로 밥을 집으려했다. “안 돼. 너 손 더러워. 엄마가 먹여줄게” 친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짐 옮기던 사람들이 친구를 찾았다. 친구가 간 뒤 아이와 나만 남았다. 그 애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밥 줄까?” 대답 대신 그 애 손이 초밥으로 향했다. 여전히 내 눈을 바라본 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이모한테 달라고 해야지. 손 더럽다고 했잖아”

아이 손에 쥔 초밥이 뭉개져 샐러드국물이 흘러나왔다. 그 애가 인상을 쓰더니 초밥을 바닥에 휙 내던졌다. 길바닥에 하얀 밥알이 굴러다니는 것만큼 생뚱맞고 더러운 것도 없다. 게다가 거긴 이웃집 대문 앞이다. 주워야했지만 내겐 휴지가 없었다. 비가 와서 축축한 바닥에 뒹군 초밥을 발로 길 구석까지 옮겼다.

밥알이 군데군데 떨어져 길이 더 지저분해졌다. 아이는 애쓰는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새 또 다른 초밥을 손에 쥐었다. “이모가 준다니까 또…” 그 애는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듯했다. 나는 남은 초밥을 모조리 아이 손에 쥐어주고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잠시 후 친구네 짐을 실은 이사차가 떠났다. 친구 부부가 내게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네가 아이 봐준 덕분에 짐 잘 옮겼어. 도시락도 잘 먹을게” 집에 돌아오니 녹초가 됐다. 또 다른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애들이 다 그렇다”며 한참 웃는다. 오히려 내가 더 애 같다나?

그러게, 여섯 살 꼬마 행동에 뭐 그리 당황하고 화가 났을까. 내 안에 있는 뭔가가 건드려졌나보다. 그 애가 잘못한 건 없는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보기로 했다. 애를 키우는 것보다 직장 다니는 게 속편하다는 말을 다시금 실감했다. 아이 키우는 양육자들, 정말 존경한다. 어쨌든, 당분간 유부초밥은 안 먹고 싶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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