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산책 <2> 산 밑의 집

“아예 집을 사버릴까?”

며칠 전 집주인에게서 집을 내놓겠다는 연락이 왔다. 전세 만기일까지는 세 달 남았다. 조금 좁긴 해도 4년 동안 살았으니 정도 많이 들었다. 이 집은 나와 남편의 신혼집이다. 낯설고도 설레던 신혼의 추억까지 두고 가는 듯해 벌써부터 아쉬움이 뭉클뭉클 솟아난다.

처음엔 전셋집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우리 형편에 딱 맞는 전셋집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물량이 없었고, 간혹 나오는 것도 평수가 너무 크거나 작아서 마땅치 않았다. 지금 사는 집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가려면 대출이 필수였다.

전세자금을 빌릴 바엔 대출금액을 좀 더 높여 아예 집을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대출금 갚는 부담이 커지겠지만 조금 적게 쓰면 되겠지, 싶었다. 부동산중개사무소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직접 집을 살폈다. 날이 더워서 그랬는지, 몇 집 가보지 않았는데도 꽤나 힘이 들었다.

맘에 드는 집을 보고 돌아오던 날, 어느 길을 지났다. 지금 사는 곳과 가까워서 늘 오며가며 지나치던 곳이다. 그날따라 그 길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옆길로 쭉 올라가면 처음 인천에 왔을 때 살았던, 그곳이 나온다.

나무 많은 집에서 대문 없는 집으로

▲ 27년 전 인천에 이사 와 살았던 마을.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설치한 방음벽이 그대로 있다.
27년 전, 우리는 경상도에서 인천으로 이사를 왔다. 내가 중학교에 막 입학한 때였다. 엄마는 며칠 전부터 우리가 이사 갈 집을 두고 “거긴 대문이 없어”라고 말했다. 길가 집인데 괜찮겠냐고도 물었다. 당시 우리가 살던 집은 대부분 시골집이 그렇듯 마당이 넓었다. 동네에서 우리 집은 ‘나무 많은 집’으로 불렸다. 엄마와 아빠는 마당을 정성스레 가꿨다. 나는 엄마가 말하는 ‘대문 없는 집’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엄마는 종이를 펼쳐 약도를 그렸다. 긴 줄 두 개를 나란히 그었다. “이건 길이야” 두 개의 선 아래에 길쭉한 네모를 그렸다. “이게 집이야” 그 네모는 버스 창문처럼 여러 개로 나뉘었다. “이건 우리 옆집들이야”

이사 오던 날, 저녁이 다 돼서야 인천에 도착했다. 운전사 포함 여섯 사람과 짐을 실은 트럭은 차 한 대 겨우 다닐만한 좁은 길로 들어섰다. 그 길은 어두운 산으로 향했다. 3월인데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가파른 길 앞에서 트럭이 잠시 멈췄다.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운전사의 말에 아빠는 “아, 이 정도는 올라가요. 갑시다”라고 호기롭게 외쳤다. 차가 천천히 오르막길을 올랐다. 뒤로 밀릴까 조마조마했다. 눈이 잔뜩 커진 걸 보니 아빠도 긴장한 게 분명했다. 다행히 트럭은 무사히 산길을 올랐다.

길이 끝나는 곳에 집이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시멘트 집이었다. 벽에는 낡은 나무 문 네 개가 같은 간격으로 붙어 있었다. 아빠가 그 중 하나를 열었다. 우리 집 현관문이었다. ‘대문 없는 집’의 실체가 눈앞에 있었다.

역대급 화장실을 만났다

▲ 27년 전 인천에 이사 와 살았던 집으로 올라가는 길.
나는 화장실이 급했다. 집주인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산으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 풀숲이 우거진 곳에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벽을 이어 붙인 두 칸짜리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발판은 나무여서 금방이라도 삭아 내려앉을 듯했고 위에선 쥐나 벌레가 뚝 떨어질 것 같았다. 이사 오기 전에도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건 여러 집이 함께 사용하는 공용 화장실이다. 앞으로 화장실 갈 일이 걱정이었다.

동네를 둘러봐도 눈에 들어오는 건 나무들뿐이었다. 이삿짐이 집안으로 다 들어가고 나니, 방 두 칸에 짐이 절반을 차지했다. 그래도 우리에겐 새 곳, 새 집이었다. 나와 언니와 동생은 자리에 누워 이 집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다가 잠이 들었다. 멀리 사슴농장이 있다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그곳 생활이라고 해서 별다를 건 없었다. 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지하수를 끌어 먹는다는 것, 전압이 딸려 두꺼비집이 자주 내려간다는 것이 조금 달랐다. 연탄을 떼는 것도, 가스레인지를 사용하는 것도 똑같았다.

언니와 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를 배정받았다. 겨울엔 해가 뜨기 전 어둑어둑할 때 버스를 타러 나왔다. 집이 외져 아빠나 엄마가 정류장까지 늘 바래다줬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선 더 일찍 집을 나섰다. 이때부턴 출근해야 하는 아빠 대신 엄마가 새벽 등굣길을, 아빠는 밤 하굣길을 담당했다. 언니와 내가 끝나는 시간이 달라 아빠는 밤마다 두 번씩 오르락내리락 해야 했다.

물론 아빠가 회식이나 야근을 하면 엄마가 대신 내려왔다. 당시 엄마 나이는 지금의 나와 서너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론,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고 한다. 아찔하고 또 아찔하다.

친구들은 우리 집에 놀러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중ㆍ고등학교를 통틀어 친구 단 한 명도 집에 데려오지 않았다. ‘친구들이 놀러오는 걸 엄마가 싫어한다’는 핑계를 댔다. 친구들에게 미안했지만 우리 집을 들키긴 싫었다.

“저 빌라 중 한 곳을 살 거야”

▲ 고가다리에서 바라본 고속도로. 오른 쪽에 옛날에 살았던 마을이 있다.
집 바로 옆에 고속도로가 뚫린다고 했다. 공사 진동 때문에 집 벽에 금이 가고 지붕에서 물이 샜다. 동네 사람들은 시청 앞으로 몰려갔다. 아빠는 콜라 한 짝을 사다 날랐다. 하지만 무허가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그곳엔 없었다. 화가 난 엄마는 공사 현장사무실로 달려갔다. “공사 때문에 시끄러워서 전화소리도 안 들리고 애들 공부도 못해요. 방음벽이라도 설치해주세요” 집 주변 도로에 방음벽이 올라왔다. 구색 갖추기에 불과했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이제부터 집에 가려면 고속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고가다리를 건너야했다. 숨이 차도록 오르막길을 올라 그 다리 한 가운데 서면 산 아래 동네가 멀리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바람을 맞으며 그곳에 서 있는 걸 좋아했다. 뻥 뚫린 도로 사이로 노을이 물드는 걸 볼 때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저만치 대규모 아파트 단지도 보였다. 나는 애써 그곳을 쳐다보지 않았다.

아랫동네에 빌라들이 여기저기 들어서기 시작했다. 어느 날 엄마가 꿈같은 이야기를 했다. 저 빌라 중 한 곳을 살 거라는 거다. 어느 주말, 엄마와 아빠는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빌라로 우리를 데려갔다. 그리 크진 않았지만 방이 세 개였다. 나는 집 안에 있는 양변기와 샤워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몇 달 후 우린 정말 그 빌라로 이사를 갔다. 하굣길 마중 나오는 일도 끝났다. 인천에 온지 6년 만이었다. 나는 다시는 고가다리를 넘지 않았다.

잊고 싶지 않았다

▲ 고속도로 위에 설치된 고가다리를 건너야 집을 오갈 수 있었다.
결혼하면서 엄마집 근처로 이사를 왔다. 엄마는 여전히 그 빌라에 산다. 내가 사는 집과 엄마 집 사이에 옛날 그 집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남편과 동네 산책을 하면서도 그 길로 올라가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며칠 전 이사 갈 집을 계약한 날에도 그 길을 지났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산으로 난 길을 바라보았다. “이 길로 쭉 올라가면 내가 살던 집이 나와” “알아. 여기 지날 때마다 그 이야기 했잖아” 그랬구나.

잊고 싶은 줄 알았는데, 잊고 싶지 않았나 보다. 자꾸 되뇌는 걸 보니. 아무에게나 내보일 수 없는 비밀을 가진 사람은 그 비밀을 보일 수 있는 누군가를 찾고 싶어 한다. 그곳에선 애써 찾을 필요가 없었다. 무엇을 먹는지, 어떤 티브이(TV) 방송을 보는지, 몇 시에 일어나고 몇 시에 자는지, 무슨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는지, 식구 중 누가 어디가 아픈지 속속들이 알 수밖에 없는 이웃들이 허술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었다. 가난과 허물을 서로 완벽하게 들킨 채로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맨얼굴을 맞댔다. 이웃들은 누추한 집에서 가난하게 살았을지언정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았다.

20년이 지나 다시 그 길을 마주했다. 길 앞에 멈춰선 채 아직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인천에 처음 올라왔을 때, 부모님은 지금의 내 나이였다. 장사로 망해 돈 한 푼 없고 배운 것도 기댈 곳도 없는데 어린 아이가 셋이나 딸렸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먹고 살고 가르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부모님의 고된 삶 앞에서 오직 가난만을 생각한 것, 그리고 가난을 부끄러워하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던 것, 마땅히 존중받아야할 삶을 감추려했던 것이 너무나 부끄럽다.

나도 비밀을 내보이고 싶다. 남편과 그곳에 가보려 한다.

※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