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허우범 시민기자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4> 한(漢)제국의 도성 ‘장안성(長安城)’

▲ 황제들이 정무를 보던 미앙궁이 있던 자리.
중국 섬서성의 서안(西安)은 관중평야와 위수(渭水)가 있어 일찍부터 제왕들이 중시한 곳이다. 그런 까닭에 왕조 11개가 서안을 수도로 삼았다. 한당(漢唐)시대에도 장안(長安)으로 불리며 국제적인 명성을 누렸다.

한나라의 도성이었던 장안성은 현 서안시내의 서북쪽에 있다. 천하를 차지한 한고조 유방은 진(秦)나라의 이궁(離宮)이었던 흥락궁(興樂宮)을 보수해 첫 궁전을 지었다. 이름을 장락궁(長樂宮)으로 고쳤다. ‘흥락(興樂)’만으로는 고작 16년밖에 누리지 못했으니, 새 왕조는 오래도록 즐거움을 누리고 싶었던 것이리라.

장락궁과 함께 실질적인 정무를 처리하는 미앙궁(未央宮)도 건설했다. 두 궁전이 동서로 마주보고 있어서 장락궁은 동궁, 미앙궁은 서궁으로 불렀다. ‘장락미앙(長樂未央)’은 ‘오래도록 즐거움이 다함이 없다’는 뜻이니, 두 궁전의 이름에서 한 왕조의 염원을 읽을 수 있다.

한나라 초기 도성인 미앙궁 입구에 섰다. 과연 2200년 전의 영화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 눈앞에는 건물 하나 보이지 않는 뻥 뚫린 언덕길이 보인다.

‘이곳이 정녕 미앙궁이 있던 곳인가?’ 대답 대신 구름 한 점 없는 창공이 황소바람만 언덕길로 내몰고 있다.

▲ 미앙궁 자리에서 바라본 한나라 장안성터.
높다란 대(臺) 모양의 전전(前殿)터에 오른다. 이곳은 미앙궁이 있던 자리다. 대에 오르니 사방으로 확 트인 대지가 넓게 펼쳐진다. 위수가 북쪽으로 흐르고 있어서인가. 미앙궁은 남향으로 배치했는데 정문은 북향에 뒀다. 대부분의 도성이 장방형인데 장안성은 마름모꼴이다. 그리고 북쪽은 북두칠성, 남쪽은 남두육성의 형상으로 굴절되게 설계했다. 이런 이유로 장안성을 두성(斗星)이라고도 부른다.

장안성의 성곽 둘레는 25킬로미터가 넘었다. 성벽 사방에는 성문이 3개씩 있었고, 성문마다 도로 3개씩을 건설했다. 도로 폭은 8미터 정도이고, 문 사이의 간격은 4미터였다. 가운데는 황제 전용도로인 치도(馳道)가 있었는데 폭이 무려 20미터나 됐다.

장안성의 높이는 약 12미터, 성벽 두께는 대략 5미터였다. 성벽에는 3미터 넓이의 길이 있었다. 성 안에는 궁전 3개와 사당, 성문 12개와 다리 16개가 있었다. 또한 사거리 8개, 9개의 구역과 관청이 있었고, 구역마다 시장이 있었다.

이러한 규모의 장안성을 쌓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인력이 동원됐을까? 1차로 장안성 부근 6백리 안의 남녀 14만 6000명을 동원했다. 5개월 후에는 노예 2만명을 투입하고, 5년 후에는 14만 5000명을 더 증원했다. 30만명이 넘는 인원이 성벽 건축에 매달렸다.

▲ 한나라 장안성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
장안성의 황금기는 7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다. 미앙궁 서남쪽에 건장궁(建章宮)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 연못을 만들고 그 위로는 두 궁전을 연결하는 하늘다리인 각도(閣道)를 만들었다. 각도의 중간에서 사방을 조망하는 모습은 마치 구름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신선과도 같았을 것이다.

신선이 되고 싶었던 무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신선이 내려와 살도록 정간루(井幹樓)를 만들고, 승로반(承露盤;구름 위의 깨끗한 이슬을 모으는 쟁반)이 설치된 신명대(神明臺)도 만들었다. 이들의 높이가 무려 50미터와 100미터가 넘었다고 하니 가히 믿기 어려운 지경이다.

세상 부러울 것 없던 화려한 장안성은 온데간데없다. 빈 터를 채우는 자동차 소음에 귀가 따갑고, 굴뚝마다 솟아오르는 연기에 시야는 흐리다. 저기쯤 정간루가 있었고, 여기쯤 각도가 있었을까? 어림짐작하려해도 그려지지 않는다. 오직 활자 속에 묻혀 상상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미앙궁은 한나라 이후에도 1000여년 넘게 존재했다. 수많은 궁전이 건축됐는데 어째서 미앙궁은 이토록 오랫동안 존재했을까. 그것은 시대를 넘어 모든 황제들의 공통 욕심과도 부합하는 뜻을 담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굳이 풍수를 따지지 않더라도 양택(陽宅)으로서 미앙궁은 모든 황제가 살고 싶은 집이기 때문이리라.

▲ 장안성 동문의 하나였던 패성문 유지.
풀들만 무성한 미앙궁터를 벗어나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동쪽으로 향했다. 나무들이 무성한 도로변에는 듬성듬성 한나라 장안성유지(長安城遺址)임을 알리는 팻말이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터가 보인다. 성벽은 흙을 시루떡처럼 다져 쌓은 판축공법(版築工法)이다. 성벽을 따라가니 한나라 초기의 성문인 패성문(覇城門)터가 나타난다. 이 문은 장락궁과 미앙궁으로 직접 통하는 궁문(宮門)이었다.

패성문의 중앙에 서서 한무제 시대를 상상한다. 황제의 호위병이 모습을 드러낼 즈음, 화려하고 장중한 성문이 열리고 궁전까지 곧게 뻗은 6차선 넓이의 치도에는 황제의 마차와 기마호위병들이 사방을 진동하며 달렸으리라. 높다란 정간루와 신명대는 햇볕에 반사돼 더욱 빛나고, 세상의 모든 생물이 궁궐을 가득 채웠으리라. 건장과 미앙을 잇는 하늘다리 아래에는 황제를 맞이하기 위해 도열한 신하들이 두 손을 모으고 읍례(揖禮)했으리니, 무제는 더 이상 무엇이 부러웠으리요.

오늘날은 장락궁도 미앙궁도 허허벌판이다. 성벽의 흔적이 남은 성문터도 농가와 밭들뿐이다. 흙길을 오가는 차량들의 먼지가 고적한 역사의 허망함을 일깨운다. 장안(長安)은 ‘장치구안(長治久安)’의 약칭이다. ‘오래도록 안정되고 영원토록 평안’하길 바라는 뜻이다. ‘장락미앙’과 동의어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천하의 제국도 마찬가지다. 왜 그런가. 서로가 권좌에 앉아 염원의 주인공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욕심이 장치구안을 바라고, 인간의 욕심이 이를 파괴한다. 설령 인간이 이를 이겨낸다 해도 결코 무궁할 수 없다. 천하의 모든 인위(人爲)는 ‘자연(自然)’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 한나라의 첫 궁전인 장락궁터.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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