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허우범 시민기자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3> 한(漢)무제의 능묘가 있는 무릉(茂陵)

▲ 20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산 같은 모습의 한무제 무릉(茂陵).
“무릉으로 옮기는 자에게는 가구당 20만전과 1만 5000평의 밭을 하사하겠노라”

유방(劉邦)이 항우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세운 한(漢)나라는 7대 황제인 무제(武帝)시기에 이르러 국력이 강성해진다. 무제는 위청ㆍ곽거병 같은 장수들을 등용해 그동안 굴욕적인 관계를 맺어온 흉노를 물리치고 최대의 영토를 차지한다.

이와 함께 자신의 사후 거처인 능묘(陵墓) 건축을 시작한다. 장소는 수도인 장안성에서 서쪽으로 약 28㎞ 떨어진 곳으로 지금의 무릉(茂陵)이다. 황제의 능은 외곽지대에 건설했기에 무제 또한 그리했지만, 자신의 능만 덩그러니 있는 것은 관리하기에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무제는 무릉읍(茂陵邑)이라는 신도시를 조성하기로 한다.

하지만 생활 터전이자 문화적 향유가 충실한 도성을 떠나 신도시로 이사 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요즘처럼 부동산 투기라도 할 수 있다면 모르지만 당시는 생각조차 못하던 시절이다. 그러하매 귀족과 부호들이 나설 턱이 없다. 무제의 입장에서도 일반 백성들만 신도시로 이전시켜서는 좋을 것이 없었다. 도시 발전도 어렵고 자신의 능묘 관리에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에 무제는 포고령을 내린다.

▲ 황량한 벌판으로 변한 무제 시기의 신도시 무릉.
“호걸과 300만전 이상의 재력가는 모두 무릉읍으로 이주하라”

이리하여 무릉읍은 일약 최고의 부호들이 모인 신도시가 된다. 무제는 기뻤다. 중앙집권체제에 필수적인 부호들의 통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 기쁜 것은 도시 발전에 이들의 경제력을 집중할 수 있고, 이는 자연적으로 자신의 능묘 보존과 관리도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주 대상자 중에는 곽해(郭解)라는 협객이 있었다. 젊었을 때 나쁜 짓을 많이 했는데 개과천선해 의협(義俠)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마당발이어서 아는 사람도 많았다. 대장군 위청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곽해는 위청을 만나 자신은 이주 자격이 안 된다고 설명했다. 위청이 무제에게 진언(進言)하자, 무제는 단호하게 잘랐다.

▲ 무릉의 대표적 관광지인 무릉박물관.
“서민인 주제에 대장군이 감싸 돌 정도라면 곽해의 집안은 가난하지 않다”

결국 곽해는 무릉읍으로 이주했다. 그가 무릉읍으로 이주한다고 하자, 그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전별금을 줬다. 그 액수가 무려 1000만전이 넘었다. 무제가 정확히 보았던 것이다.

무제는 신도시를 발전시키기 위해 포고령과 함께 우대정책을 병행했다. 벼슬아치나 상인, 기술자 등 이주 희망자에게 돈과 땅을 하사한 것이다. 이러한 우대정책에 힘입어 ‘사기’의 저자 사마천(司馬遷)도 어린 시절 신도시로 이사했다. 유교를 정치철학으로 발전시킨 동중서(董仲舒)와 당시 최고의 문학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 등도 신도시로 옮겼다.

그 결과, 신도시 무릉은 6만이 넘는 가구에 약 28만명의 인구가 살았다. 이는 도성에 사는 인구와 비교해도 40%가 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광역시가 탄생한 것이다. 신도시 건설에는 예산과 인력도 엄청나게 투입됐다. 무제시기는 최고의 경제력을 구가하던 때이기에 세수(稅收) 또한 최고였다. 부호들의 참여는 물론 1년 세금의 3분의 1이 넘는 예산을 쏟아 부었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지역이니 관리와 상인 등의 왕래도 빈번해졌다. 백성들도 농사를 포기하고 몰려들었고, 협객의 무리들도 이득을 얻고자 모여들었다. 열후나 귀족들 사이에서는 하루가 멀게 사치의 강도가 높아져갔다. 돈의 향기가 향락과 타락을 부채질했고 민생치안은 가진 자들의 것이 됐다. 개발 열기에 한 몫 잡은 이들만 흥청망청 즐기는 신도시가 된 것이다.

서안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무릉이 있는 흥평시(興平市)로 향했다. 2000여년의 세파에도 불구하고 평지 위의 무릉은 아직도 산처럼 우뚝하다. 오랜 시간 무너지고 주저앉은 것이 이 정도라면 원래의 모습은 어느 정도였을까. ‘장안지(長安志)’를 보면, 한나라 때 황제의 능은 높이가 12장(丈), 둘레가 120보(步)였다. 무제는 최고의 황제답게 높이를 14장, 둘레를 140보로 했다. 1장은 약 3.33미터이니 46미터가 넘는다. 아파트 15층 높이인 것이다.

▲ 쓸쓸한 벌판 위의 위청 묘(왼쪽)와 곽거병 묘.
무릉은 53년 동안 지어졌다. 국가 경제력이 휘청거릴 정도로 많은 예산이 투입됐다. 그러나 2000여년 후 둘러보는 무릉(茂陵)은 드넓은 밭과 배장묘 몇 개뿐이다. 한나라 초기, 최대의 능묘와 최고의 도시로서 누렸던 영화로운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무제가 진정으로 사랑해 황후에 준하는 대우를 했던 이부인, 흉노 공략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위청과 곽거병, 흉노 휴도왕의 태자로 무제에게 투항해 충성한 김일제, 무제의 유언을 받들어 어린 소제(昭帝)를 보필한 곽광 등의 묘만이 무상한 역사의 기억을 더듬게 한다.

이러하매 이곳이 무제시기 최대의 신도시였다는 것을 알 턱이 없다. 오늘날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대부분 곽거병의 묘가 있는 무릉박물관을 찾는다. 무릉과 이부인 묘, 위청 묘는 멀리서 조망하고, 김일제나 곽광의 묘는 둘러보지도 않는다. 원래부터 황제 능과 곽거병 묘만 있는 곳으로 알아왔던 까닭이다.

지금도 수천 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는 도시가 많다. 그런데 무제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인 무릉은 어째서 오래가지 못한 것일까. 그것은 도시의 형성조건인 교통의 요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교통과 상업이 활발하지 않으니 다양한 문화의 생산이 어렵고, 능묘 보호가 목적이니 대도시의 필수요건인 강도 멀었다. 여타의 왕릉에 세워졌던 도시들이 모두 자취 없이 사라진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도시의 생명력은 문화 창출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네트워크로 자신의 삶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삶을 공유하는 문화를 생산한다. 이러한 문화가 축적돼 그 도시만의 전통이 된다. 경제력 창출을 넘어 문화를 이끄는 도시가 생명력 넘치는 도시인 것이다. 이러한 도시는 번창하고 장수하기 마련이다.

21세기는 국가보다 도시가 중시되는 시대다. 동북아시아 허브를 주창하는 우리 도시는 문화를 창출하고 있는가. 글로벌시대를 선도하는 도시가 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스스로 반문해볼 일이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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