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람] 김영수 목공소 ‘아프리카’ 사장

지난 23일 인천 중구 신포동에 있는 목공소 ‘아프리카’에 갔다. 동인천역 근처에 있는 대한서림에서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다가 홍예문 가기 전 왼쪽에 위치해있다. 목공소 앞 담벼락에는 아이들이 나무판 위에 알록달록 색칠한 작품들이 빼곡히 걸려있다. 그 전에는 쓰레기가 쌓여있었는데 김영수(46) ‘아프리카’ 사장이 아이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인도에 화분을 설치한 뒤에는 아무도 쓰레기를 두질 않는다.

인터뷰를 시작하려하자, 김 사장은 잠시만 기다려달라며 음악을 틀었다. 혼자 있어도 서먹해 늘 음악을 틀어 놓는단다. ‘혼자 있어도 서먹하다’는 말이 잘 이해되질 않아 물었다.

“눈앞에 그림이 있거나 시각적으로 충족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더라도 공간의 여백이 느껴져요. 적적하다고 해야 하나요? 적적한 게 어색하고 서먹해 음악을 틉니다”

‘예술가는 다른 것 같다’고 말하자, 본인은 예술가가 아니라고 부인한다. 소탈하면서도 진지한 김 사장의 얘기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예술가는 ‘생각노동’을 하는 사람”

▲ 김영수 목공소 ‘아프리카’ 사장.
지난해 인천문화재단 지원으로 예술가 6명이 ‘인천예술소동 2016 300프로젝트’ 사업을 진행했다. 300프로젝트는 인천지역 개인단위 예술생산거점에 기반 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공공미술은 함께 산다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과 예술가의 존재방식에 대한 성찰과 실천이라는 이해를 전제로 접근했다. 300은 작가별 기금 300만원으로 프로젝트 주제를 작업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이경복씨가 절 찾아왔어요. ‘인천문화재단 후원으로 이웃과 소통하는 공공미술을 하겠다. 같이 해 달라’고요. 왜 나 같은 노가다꾼한테 찾아왔는지 어처구니없고 잘 모르겠더라고요. 내가 하고 있는 일 자체가 이웃과 소통하는 거니까 특별히 뭘 안 하고 그냥 보여주면 된다고 해서 같이 했습니다”

김 사장은 본인을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예술가들과 작업하면서 더 뼈저리게 느꼈다고.

“예전에는 넓은 공간에 돌멩이 하나를 두거나 큰 화선지에 선 하나만 그려놓고 삼라만상의 이치를 설명하는 예술가들을 보면 사기꾼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가까이서 좌담회를 하고 토론을 해보니 고민이 많더라고요. 예술은 사람들이 정서적ㆍ감성적으로 아파할 때 달래주고 방향을 제시하는 등대 같은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엔 작가들의 작품들이 황당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는데 지금은 ‘생각노동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가령, 돌멩이를 하나 놓더라도 어떤 의미를 담으려하는지, 바라보는 관객들이 어떤 느낌을 받을지 깊게 고민하는 모습을 봤어요. 같이 고민하면서 좀 겸손해졌습니다. 지금은 내가 감히 예술가라는 이름을 달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아무 고민 없이 그냥 그림을 그리거든요. 무의식의 표현인거죠. 그리고 제 그림을 볼 사람에 대한 배려도 없어요. 관객의 입장을 고민하면 예술가인데, 전 아닙니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진 않아요”

김 사장은 4년 전에 이곳에 왔다. 예술가가 많이 사는 이 동네에 ‘아프리카’가 유일한 목공소라 작가들의 전시회나 무대를 만들 때 도와주다보니 많은 작가들과 친분이 생겼다. 특히 아트플랫폼 입주 작가들과는 4년째 일하고 있다.

지금도 질풍노도의 시기

김씨는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바로 부산 다대포로 가 고등학교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부산해양고교 항해과를 졸업한 그는 고교 3학년 때 항해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필요조건인 승선 9개월을 이루기 위해 배를 탔다. “그때부터 인성이 망가졌다”고 그는 표현했다.

“첫 사회생활인데 적응하지 못했어요. 모진 구타와 완력 사용에 세상을 경멸하기 시작했죠. 그때 어른들에 대한 환멸을 경험했어요. 지금도 어른들이 싫어요. 그때부터 사춘기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금까지도 경험하고 있어요”

배를 15개월 타고 방황하다가 해병대에 자원했다. 구타가 싫었는데 규율이 세기로 유명한 해병대를 지원한 이유를 묻자, “자격지심이었던 같다”고 답했다. 그리곤 자신이 살아온 아픈 얘기를 담담하게 들려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사망한 뒤로 집안은 더욱 어려워졌다. 형과 누나도 사춘기를 겪느라 막내인 김 사장을 돌보지 않았고, 어머니는 생업전선에서 고된 노동을 했다. 가정의 돌봄도, 친구도 없던 김 사장은 외톨이가 됐다. 중학교 때는 벙어리로 살았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신을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에 아이들과 자주 싸웠고, 교사들에게 요주의 인물로 인식됐다.

“해병대도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으로 갔던 거 같아요. 저는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어떤 운명은, 잘못하면 팔자가 되거든요. 제대하고 노가다 판에서 일했기 때문에 지금 목공소를 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제가 이곳에 있는 걸 부러워해요. ‘좋아하는 일 하니까 좋지 않냐’고 하면서요. 지금도 전기톱을 켤 때마다 무섭고 긴장돼요. 나무를 자를 때 손가락이 잘리는 상상을 하거든요. 최악의 상황은 내 몸이 무너지는 거니까요. 살면서 안 좋은 일이 많다보니 지레 겁을 먹어요”

그는 10여년 전 농산물도매시장에서 무(알타리) 중매인으로 일했다. 힘들었지만 집과 차를 장만할 만큼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절이었다. 그러나 번 돈을 사업에 투자해 수억원을 빚지고 다시 비참한 시간을 보냈다. 다시 노가다 판을 떠돌다 4년 전 이곳에 정착한 것이다. ‘내 인생은 안 된다’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헤매다 월세가 싼 이곳에 머물게 됐단다. 외롭고 적적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3년 전이다.

“이곳에 와서 아프리카를 생각했어요.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의미가 없었을 때 티브이에서 아프리카에 대한 방송이 나오더라고요. 지붕도 없는 학교에 세 시간이나 뛰어가 공부하는 아이들과 지옥 같은 가난의 고리를 대물림하지 않으려면 아이들을 교육시켜야한다는 것을 아는 부모들의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환경이 너무 열악하더라고요. 그 때 ‘돈이 없어서 기부하지는 못해도 난 노가다를 했으니까 벽돌도 만들어주고 지붕도 보수해주고 몸으로 때워서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프리카에서 내가 그런 활동을 한다면 어느 날 내가 죽더라도 그 사람들만큼은 내 죽음을 안타까워하겠구나, 최소한 세상에 왔다가 가는 의미는 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아프리카에서 죽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이들은 나에게, 아프리카 같은 곳

▲ ‘아프리카’ 맞은편 담장에는 동네 아이들이 나무판에 알록달록 색칠한 작품이 걸려있다. 인도 위에는 화단도 두었다.
그는 여전히 사람들하고 관계를 잘 맺지 못한다. 상처받는 게 무서워서다. 목공소를 차리고 목공소 맞은편에 아이들의 그림으로 담벼락을 만든 후 예쁜 화단을 설치해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해주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이 같을 순 없는 법이다. 화단 설치로 주차하기 어렵다거나 담벼락 그림으로 쓰레기를 버릴 수 없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 주민들이 지방자치단체에 민원을 넣기도 하고, 그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는 ‘꼬인 인생은 역시 안 되는구나’라고 절망했다.

“이 동네에 4년째 사는데 유일한 친구가 한 명 있어요. 철학관을 운영하고 있는 할머니(86)이신데요, 참 경우가 바른 분이예요. 한 번도 저한테 말은 놓으신 적이 없어요. 우리 사무실에서 담배 한 대 얻어 피우시면 꼭 음료수나 담배를 사주고 가시는 어르신이죠. 얼마 전에는 내가 너무 힘들어 그 철학관에 가서 5만원을 내고 엉엉 울면서 하소연한 적도 있어요”

김 사장은 ‘아이들은 아프리카 같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 몸에 문신이 있어요. 어른들은 그것만으로도 선입견으로 저를 대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아이들은 ‘아저씨 그게 뭐예요’라고 물으면서 거리낌 없이 대화해요. 아이들에게 사탕 한 알을 주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재료를 주면 좋아해요. 그러면 ‘나도 좋은 사람이구나, 내 인생도 조금은 의미가 있구나’라고 자위를 하죠. 아이들은 제게 아프리카 같은 존재예요”

한 번은 어떤 미술가가 김 사장을 찾아왔다. 그가 나온 기사나 블로그를 보고 따지기 위해서였단다. 김 사장이 아이들과 하는 모든 행동이 봉사나 배려가 아닌 자위하기 위함인데 가증스럽게 봉사라고 미화한 것이 불쾌해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 말이 다 맞는 거 같아서 찍소리 못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참 생각하니까 억울하더라고요. 그러면 어때요? 아이들이 좋아하고 신나면 된 거 아니에요? 아무한테도 해가 되지 않았는데요. 제가 하는 일에 딴죽 거는 사람이 많아서 상처를 받아요. 그래서 더 극단적으로 어른들과 섞이고 싶지 않고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은 거죠”

‘아프리카’는 아이들의 아지트

▲ ‘아프리카’ 건물 1층은 목공소이고, 지하는 공연과 전시,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지난 2014년 10월 31일 ‘구미호 데이’를 진행했다.

“서울의 이대나 홍대에선 할로윈 데이를 하잖아요. 이 동네 애들은 서울까지 가기 어려우니 이름을 ‘구미호 데이’로 바꿔서 동네에서 놀아보자는 겁니다. 물감과 화장품으로 메이크업하고 간식을 먹으면서 놀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신나하더라고요. 지난해에는 재즈밴드가 와서 같이 놀았습니다”

김 사장은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뭔가를 구상하고 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 아트센터를 후원하는 일이다. 중구 관동에 있는 관동갤러리의 도다 이쿠코 관장 소개로 일본인인 짐바브웨 아트센터 관장과 짐바브웨 아이들을 알게 된 후 그곳을 어떻게 후원해야할지 고민했다.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데 인터뷰에 응한 것도 이것을 홍보하고 싶어서란다.

“제가 아프리카에 물품을 보내기 위해 중고 의류나 생활용품을 모으고 있는 걸 관동갤러리 관장이 알았나 봐요. 짐바브웨 아트센터를 후원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해, 좋다고 했죠. 단순하게 물품을 후원하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문화교류를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면 좋을 거 같아요. 짐바브웨 아트센터 관장과 아이들을 지난해 가을에 처음 본 후, 그들이 세 번 정도 저를 찾아왔어요. 6월 9일부터 열흘간 일본에 공연하러 온다기에 저도 가보려고 합니다”

짐바브웨 아이들이 인천에서 공연이나 전시를 할 수 있는 기회와 이들을 후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게 김 사장의 바람이다.

“아트플랫폼 같은 공간에서 짐바브웨 아이들이 공연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백신과 같은 의약품을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술 활동을 후원하고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변에서 저를 돕겠다는 사람이 늘고 있어요. 하지만 구체적인 실체가 없으니까 망설이는 사람도 많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사회적 협동조합을 만들고 싶어요. 제가 아프리카 현지에서 살면서 집이 필요한 사람들한테는 집을 지어주고 우물이 필요한 사람들한테는 우물을 파주는 일을 한다면, 이곳에선 사회적 협동조합을 운영해 대기업의 후원도 이끌어내고 안정적인 후원시스템을 갖추는 일을 하는 스태프가 필요할 거 같아요. 노가다꾼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한정돼있어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목공소 ‘아프리카’ 지하에는 작지 않은 규모의 공간이 있다.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재즈 등을 공연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이곳을, 김 사장은 ‘아이들의 아지트’라고 소개했다. 조명이나 음향시설이 변변하지 않지만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 소신 있는 작가들의 작품 전시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취지였다. 작품 관람으로 아이들의 문화적 감수성을 키워주고 싶었던 것이다.

“4월에 어떤 작가의 전시를 하기 위해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어요. 우리는 대관료가 없는데 그 작가가 인테리어를 과하게 요구하더라고요. 이곳은 아이들의 아지트인데 그 작가의 요구대로면 아이들이 놀 수 없어요. 비용문제도 있지만 아이들의 놀 공간이 저에겐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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