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꽃 ⑧

노동으로 흘린 땀이 마른 자국이 마치 꽃과 같아 소금꽃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예비)노동자들이 시민기자로 참여해 노동 현장이나 삶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시계바늘이 오후 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7시간 30분 노동했고, 이제 30분의 일과가 남았다. 약국을 다녀오면 얼추 퇴근시간이 될 듯했다. 약국에는 병동 간호조무사 둘이 피곤한 얼굴로 약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을 챙겨 나오다 응급실에서 같이 일했던 준이를 만났다.

“고수님. 아침근무였네요” 준이가 장난스런 호칭으로 농담을 했다.

“어허. 왜 그러시나. 매번 지는데”

준이는 가끔 만나 당구 치고 술 마시는 후배다.

“고수님. 오늘 한 게임 어떠신지요?”

“또 게임 값 내주고 술 사줘야하는 거야? 알았어”

“형. 그럼 배불뚝이 불러서 같이 볼까?”

“그래. 배불뚝이 본 지도 오래됐네. 연락하고 문자 줘”

당구장에 들어서니 배불뚝이 상이가 먼저 와서 연습하고 있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야구 모자를 눌러 쓴 모습이 변하지 않는 캐릭터다. 불뚝 나온 배도 반갑기만 하다. 함께 일할 때 마음도 잘 맞고 나를 잘 따르던 후배였는데 퇴사하고 지금은 트럭운전을 하고 있다. 몇 달 만에 보는데도 엊그제 본 것처럼 편하다.

“연습하면 반칙이지” 준이가 한마디 하자, 당구공에 큐를 조준하던 상이가 고개를 돌려 히죽 웃는다.

“우리 숏다리 형님. 오랜만이네요” 상이가 솥뚜껑만한 손바닥으로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그래. 그런데 불뚝 배는 여전하네” 상이의 인사에 장난으로 답했다.

당구수를 정하고 순서도 정했다. 내가 20개고, 상이와 준이가 25개의 쓰리쿠션을 치는 것이다. 당구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타이틀이 걸려야한다. 꼴찌가 술을 사고, 2등이 게임비용 내기다.

국제식 당구대에서 쓰리쿠션을 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일단 당구대가 크고 길다. 나처럼 신장이 짧은 사람은 불리한 구조다. 그리고 당구공을 맞히는 두께와 회전을 어디에, 얼마만큼 주느냐에 따라 공의 진행이 변한다. 또한 공을 맞히는 강도에 따라 공의 흐름이 달라진다. 당구는 여러모로 정교함이 요구되는 스포츠다.

당구수가 낮은 내가 초구를 쳤다. 한 개를 성공하고 두 개를 칠 수 있는 기회다. 공이 서있는 위치가 어렵지 않아 대충 큐 샷을 했다. 공이 회전을 먹고 진행하는 중에 예상치 못한 키스가 나서 실패했다. 내 불행은 곧바로 상대에게 행복이 된다. 상이가 연속 두 개를 쳤고, 다음으로 준이가 세 개를 성공했다.

당구를 치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미세한 회전이나 두께 차이가 목적 구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갈 때의 아쉬움을. 반면 키스로 인해 생각지도 않게 득점을 했을 때 미안한 척하는 흐뭇함을. 차츰 상대의 점수판이 올라갈수록 마음은 급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다 보면 게임은 백전백패가 된다. 결국 상이가 술을 사고, 내가 게임비용을 내게 됐다.

당구장을 나와 근처 술집으로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와 직장이야기를 하다 자연스레 선거이야기가 나왔다. 대통령선거가 일주일도 남지 않았고, 티브이 토론이 사람들 입에 한창 오르내리던 때였다.

소주 한 병을 더 시키고 상이와 준이에게 대통령선거에서 ○○○을 찍어달라고 했다. 그 사람이 돼야 우리 같은 서민 형편이 나아질 수 있다는 설명을 곁들여서.

둘은 정치에 관심이 많지 않기에 나를 믿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 그 후보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술이 나오고 안주도 하나 더 시켰다.

“형님. 나는 그냥 군대 때 사단장 했던 △△△을 찍을까 했는데요”

“형님. 나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 투표 안 할 거예요”

아니 이게 뭔 소리란 말인가.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사단장 그 사람 사퇴했어. 그리고 정책을 보고 뽑아야지. 대통령이란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번에 봐서 알잖아”

둘의 이야기를 듣다가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마음에 드는 사람 없으면 내가 말한 사람 찍으면 되지. 십분도 안 걸려” 냉정하고 침착하게 말해야지 하는 마음에도 목소리가 자연스레 커지려했다.

“형님. 그러면 저하고 애 엄마는 형님 말한 사람 찍을 게요. 어려운 것도 아닌데요. 뭘”

상황이 갑자기 변했다. 당구에서 난코스 때 행운의 키스로 득점해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처럼 열세에서 우세로 바뀐 것이다. 이제 한 명 남았다. 술을 두 병 더 비웠지만 투표하지 않겠다는 후배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누구를 뽑더라도 투표권을 행사해야한다. 아니다. 난 투표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이런 말로 옥신각신했다.

서운함을 넘어서 미운 감정이 생길 것 같았다. 눈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잃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했다. 한 표가 아쉽지만 술자리를 정리하든가 아니면 주제를 바꿔야했다. 시계는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 막잔 하고 한 게임 더 하러가죠”

아까 꼴찌한 상이가 복수전을 제안했다. 이대로 헤어지면 서로 어색했을 텐데, 다행이다. 가게를 나와 당구장으로 걸었다. 앞서 걷는 둘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한 놈은 예뻐 보이고, 한 놈은 안 예뻐 보였다. 당구장으로 들어서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안 예쁜 너는 내가 견제 확실하게 해준다. 나 뒤끝 있다고’

/한재호 시민기자

※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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