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 되니 날씨가 확 달라졌다. 햇볕은 따뜻하고 바람도 상쾌하다. 연두색 이파리가 하루하루 눈에 띄게 커지고 있다. 밖에 나가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도 햇빛의 유혹에 못 이겨 산책을 자주 나간다. 가까이 사는 엄마는 내 단골 산책 파트너다.

엄마와 나는 걷는 걸 무척 좋아한다. 엄마는 스마트폰에 만보기 앱을 깔아두고 “오늘은 얼마나 걸었나?” 하며 꼬박꼬박 확인한다. 엄마의 목표는 언제나 1만보다. 두 시간 정도 천천히 걸으면 만보를 채울 수 있다. 그러고도 엄마는 지치지 않는다. “내가 너보다 잘 걸을 걸? 나 아직 거뜬해!” 예순여덟 살인 엄마는 한참 젊은 내 앞에서 늘 자신만만하다.

지난 주말에도 근처 공원을 함께 걸었다. 한 시간쯤 지나니 강한 햇빛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엄마는 왠지 힘이 없어 보였다.

“엄마, 어디 불편해?” “요 며칠 설사를 했더니 기운이 없네” “뭘 잘못 먹었나?” “아니, 별 거 없었어. 상추쌈 먹었더니 그러네” “생채소 많이 먹으면 설사해. 맛있어도 좀 적게 드시지?” “안 그래도 대여섯 장 꺼내 놓고 먹고 있어. 그런데도 계속…”

날마다 새로운 음식을 해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와 달리 엄마는 요리를 거의 하지 않는다. 김치나 무짠지, 마른멸치와 고추장이 주 메뉴다. 요리는 너무너무 귀찮고, 반찬은 김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밥은 그저 배불리 먹으면 된다는 것이 평소 엄마의 밥상철학이다.

▲ ⓒ심혜진.
3년 전 엄마네 근처로 이사를 온 뒤에야 이렇게 ‘빈곤한’ 엄마의 밥상을 자세히 알게 됐다. 무엇보다 건강이 걱정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사나흘에 한 번 화장실에 간다고 했다. 변비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나이가 들어 몸에 물기가 없어져서 그런 것”이라는 이상한 이유를 댔다.

나는 엄마에게 백미를 현미로 바꾸고, 한 끼에 손바닥만 한 잎채소 7~8장은 먹어야한다고 말했다. “귀찮다”며 고집스레 버티던 엄마를 끈질기게 설득해 드디어 엄마도 채소와 과일을 냉장고에 들여놓기 시작했다. 반찬도 한두 가지 늘어났다. 어느 날엔가, 끼니마다 상추쌈 먹는 재미가 아주 그만이라며 “상추에 땅콩조림이나 멸치볶음을 올려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 줄 알아?” 하며 신나했다. 아침마다 시원하게 ‘큰일’을 본다며 들뜬 목소리로 자랑도 했다.

아마 엄마는 아주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끼니를 성실하게 챙기느라 음식 하는 것에 이골이 났을 것이다. 식구들이 모두 집을 떠난 후엔 고된 노동에서 놓여난 해방감을 맘껏 즐겼을 테고, 그 자유가 한없이 달콤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엄마는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하고 상을 차릴 줄 몰랐다. 배 채우기도 버거운 가난한 살림에 맛있는 건 새끼들 입에 먼저 넣어주기 바빴으니 그 긴 세월 동안 ‘나를 위한 밥상’라는 걸 상상이나 해봤을까.

고작 상추쌈일 뿐이지만, 이제 막 자신을 위해 약간의 정성을 들여 소박한 밥상을 차리기 시작한 엄마에게 그 기쁨이 얼마나 남달랐을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오래 지나지 않아, 몸이 생채소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벌써 한 달 가까이 배앓이를 하는 중이란다. 그날 공원에서 엄마는, 어쩌면 앞으로 상추쌈을 먹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을 한참 동안 토로했다. 나도 괜히 서글퍼졌다.

이후 아침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대장은 어떠신지?” 하고 안부를 묻는다. 생채소 대신 익힌 우거지와 시금치나물을 먹으면서 많이 좋아지고 있단다. 대장에 문제가 있는 건지, 조만간 병원에 다녀올 생각이란다. 언제부턴가 내 나이 느는 것보다 엄마가 나이를 먹는 게 더 싫어졌다. 나보다 잘 걷는 우리 엄마, 배가 얼른 나아서 다시 상추쌈 실컷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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