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의 현장, 부평토굴(3)

부평토굴은 일제강점기에 생겨난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존재가치가 없어져 오랫동안 방치된 채 있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멀어져가던 이곳은 세월이 지나며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조금씩 다른 용도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버섯을 재배하던 공간이기도 했고, 간장을 보관하는 창고이기도 했다. 화랑농장마을에 있는 어느 토굴은 한여름 동네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모이던 피서지였다. 사람들은 어두운 토굴 안에 불을 밝히고 삼삼오오 모여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중에서도 부평토굴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린 것은 새우젓 숙성이었다. 이따금 지역신문에도 부평 새우젓 굴에 관한 기사가 오르내리곤 했다. 새우젓과 부평토굴이 만난 것은 40년도 더 됐다. 이번에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이 바로 이 ‘부평 새우젓 굴’에 관한 것이다.

부평문화원은 지난해 ‘부평토굴 콘텐츠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부평토굴을 위치와 속성에 따라 크게 A~D구역으로 나눴는데, 부평 새우젓 굴은 C구역에 해당한다.

화랑농장에서 장고개로 가는 산길 중간에 위치해있다. 외진 곳이긴 하지만 그 앞을 등산객들이 드문드문 지나간다. 설령 신문 기사 등으로 부평 새우젓 굴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다 할지라도, 오솔길 옆에 철문에 가린 새우젓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다수의 부평사람들은 토굴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 더구나 길 한 쪽에는 군부대의 담벼락과 철책선이 길게 늘어서 있다.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이 생경한 모습으로 시간이 멈춰버린 듯하다.

부평토굴과 새우젓의 만남

▲ 부평구 화랑농장마을에 있는 토굴. 과거 마을사람들의 피서지였다.
부평토굴을 새우젓 굴로 이용하기 시작한 때는 연안부두 어시장이 개장하던 무렵이다. 상인 몇몇이 새우젓을 보관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소래포구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새우젓 숙성고로 부평토굴을 택했다. 그 당시에 생산된 새우젓은 지금보다 양도 많은 데다 어시장이 생기며 사람들도 많이 찾아와 수요가 적지 않았다.

또한 요즘과 같이 저온저장시설이 발달하지 않았고, 시설도 부족했다. 새우젓을 지속적으로 보관하고 숙성시킬 곳이 필요하던 때에 부평토굴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준 것이다. 일 년 내내 일정하게 유지되는 온도와 적당한 습도는 새우젓을 숙성시킬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전통방식으로 숙성시켜 만들기에 맛도 좋아 인기가 많았다.

일반적인 저온창고와 비교했을 때 비용도 ‘10분의 1’정도 저렴했다. 이 가격으로 많은 양을 저장할 수 있는 곳은 인천 인근에서 부평 새우젓 굴이 거의 유일하다고 한다. 인천 연안에서 잡힌 새우의 양은 해마다 다르지만 많이 잡힐 때는 저온창고에 보관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양을 부평토굴에 넣어 보관했다. 충청도에 광천토굴이 있긴 해도 거리가 멀어 자주 이용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봄에 소금에 절여 넣어둔 새우를 토굴에 넣어 숙성시켜 김장철을 앞두고 가을에 꺼내 팔고, 10~11월에 잡은 새우로 젓갈을 만들어 다시 토굴에 넣고 숙성과정을 거쳐 이듬해 3~5월에 빼서 판다. 이렇게 새우젓을 순환시켰다.

하지만, 현재 부평 새우젓 굴은 작년 말부터 운영하지 않는다. 운영자의 내부 문제 때문이란다. 지금은 토굴 안에 새우젓 드럼통이 없다. 전기시설이 없던 토굴 내부에 전구를 대신했던 양초들과 새우젓 숙성에 사용됐던 포대나 비닐 등만이 뒹굴고 있다. 이와 더불어 새우젓을 구분하기 위해 토굴 내부 벽에 적은 상인 이름이나 가게 이름이, 이곳이 새우젓 굴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부평 새우젓 굴은 다른 부평토굴들에 비해 차량 접근이 용이하다. 굴 앞에 트럭 화물칸 높이와 같게 턱을 평평하게 만들어놓았다. 무거운 새우젓 드럼통을 트럭에서 땅바닥으로 옮기기 쉽게 하기 위해서다. 새우젓을 담은 드럼통 하나의 무게는 200~250kg정도다. 건장한 성인 남성 두 명 정도가 힘껏 수레에 올려 밀어야 간신히 이동할 수 있다. 비포장 흙길이어서 훨씬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

눈으로 확인한 부평토굴 새우젓 운반과정

▲ 부평토굴 중 새우젓 숙성 장소로 이용된 토굴의 모습.
부평문화원이 조사하던 때는 아직 새우젓 굴로 사용되고 있을 때였다. 그 덕에 새우젓을 토굴로 운반하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새우젓을 가득 실은 트럭이 토굴 앞에 도착한 건 동이 트기 전인 새벽 6시 무렵이었다. C구역 4번 토굴 앞에서 콘텐츠 발굴단 어르신들과 만나 새우젓 드럼통을 실은 1.5톤 트럭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새벽녘이 밝아올 때쯤 트럭 한 대가 꼬불꼬불한 산길을 지나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리고 후미를 토굴 쪽으로 향해 멈춰 섰다.

싣고 온 새우젓을 모두 내린 운송 담당자는 선주(어민)가 요청한 새우젓을 확인하며 토굴에서 트럭에 실어야할 드럼통을 찾았다. 새 것이 들어오고 숙성된 것이 나가며 새우젓은 굴 입구를 사이에 두고 서로 자리를 바꿨다. “새우젓은 최장 10개월 정도 토굴에서 보관이 가능하지만, 올해(=2016년)는 생산량이 유난히 적어 굴에 넣을 것이 별로 없다”는 말이 굴 안을 맴돌았다.

새우젓 드럼통은 굴 양쪽에 두 줄씩 끝까지 꽉 채워서 넣으면 1000여개 정도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날 어시장으로 가져가는 새우젓 드럼통은 모두 두 개. 지난봄에 어민들이 잡아서 배 위에서 염장한 새우를 숙성시키기 위해 토굴에 넣어둔 것이다. 토굴에서 꺼낸 새우젓은 어시장 좌판대로 바로 가져가 중간상인 없이 소비자들에게 바로 선보인다.

토굴에서 출발한 트럭은 약 40분을 달려 어시장 공판장에 도착했다. 여기서 드럼통 바닥에 묻은 흙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선주들이 운영하는 젓갈 직판장으로 향했다. 젓갈을 팔고 있는 어민이 드럼통 위에 있는 표식을 보며 자신들이 넣어둔 새우젓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모든 운송과정이 끝났다.

광천토굴처럼 활성화됐다면 어떠했을까

▲ 부평토굴에서 숙성된 새우젓을 운반하는 모습.
부평 새우젓 굴에 보관할 수 있는 드럼통의 양은 C구역의 7곳을 모두 사용했을 경우 최대 약 7000드럼 정도라고 한다. 새우젓을 담은 드럼통 한 개의 무게를 250kg으로 추산했을 때 부평토굴의 최대 새우젓 저장량은 1750톤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전국에서 새우젓 굴 하면 첫 번째로 꼽히는 곳이 바로 충남에 있는 광천토굴이다. 2012년 무렵 광천토굴에서 숙성된 새우젓은 연간 6000톤, 전국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고 한다. 광천토굴과 비교했을 때 ‘3분의 1’에 조금 못 미치는 양이지만, 부평 새우젓 굴도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1959년에 광천토굴에서 새우젓 숙성을 처음 시작했다고 알려진 고(故) 윤만길님은 1990년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부평의 왜놈들 무기창고에 보관하고, 요즘은 목포에도 굴을 파서 보관한다는데 이 지역 토굴 제품이 제일 낫다”라고 하며 부평 새우젓 굴을 짤막하게 언급했다.

부평 새우젓 굴이 광천토굴처럼 활성화됐다면 어떠했을지 잠시 상상해보기도 하지만, 오히려 개발되지 않은 덕분에 지금까지 토굴의 원형 그대로를 볼 수 있어서 더욱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새우젓은 부평토굴에 흔적을 남긴 또 하나의 지문이다.

/김규혁(부평문화원 기획사업팀장) 시민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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