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간] 한국무술박물관(인천 중구 차이나타운)

인천에는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것이 많다. 1883년 인천 제물포가 개항된 이후 서구식 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와서다. 쿵푸로 잘 알려진 중국 무술이 최초로 우리나라에 상륙한 곳도 인천이다.

지난 3월 28일 중구 차이나타운에 있는 한국무술박물관을 찾아갔다. 백년짜장으로 유명한 ‘만다복’ 맞은편에 있는 계단을 조금만 오르다보면 오른편에 있다. 인천에서 태어난 화교 출신 필서신(59) 관장을 만나 중국 무술과 차이나타운, 화교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그는 현재 중구 신포동에서 쿵푸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1970년대 대한민국 대표로 국제대회 참가

▲ 필서신 한국무술박물관 관장.
1959년 주안에서 태어난 필 관장은 그의 아버지가 18세 때인 1930년대 필 관장의 할아버지와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필 관장은 무술을 9세 때 처음 배웠다. 당시 인천에서 중국 무술을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은 두 명뿐이었다. 그 중에 한 명이 필 관장의 집안 어른인 필서익 할아버지였다.

“그 때는 다들 조금씩 운동을 했어요. 당시 특별히 할 것도 없고 집안에 운동하는 어른이 있어서 따라 했죠. 나중에는 싫어도 억지로 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안 해도 되겠다고 좋아했는데, 허전하더라고요. 오히려 본격적으로 운동을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인 1972년부터 본격적으로 운동을 한 필 관장은 1976년께부터 우리나라를 대표해 국제대회에 나갔다. 그때는 중국과 우리나라가 수교를 맺기 전이라, 홍콩이나 대만에서 하는 국제대회만 참가할 수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오히려 외국에서 개최하는 대회에 참석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여권이나 비자를 만들기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1980년까지는 화교들이 한국 대표로 많이 참가했는데, 그 후로는 한국 사람이 국제대회에 많이 갈 수 있게 됐습니다”

필 관장은 처음에는 중국 북쪽지방에 많이 퍼져있는 팔괘장을 배웠다. 또 한 분의 스승인 노수전의 제자를 통해서다. 그런데 1979년 대만에서 중국 남쪽지방 무술인 홍가권을 익혔다. 선수권대회에 참여하느라 다녔던 대만에서 무술과 학업을 이어갔으며, 대만과 홍콩 영화사와 연결이 돼 영화 무술감독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스턴트맨으로 영화에 직접 출연한 적도 있다.

1983년에 한국과 영화 관련 계약을 맺고 들어온 필 관장은 경기도 김포에서 체육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체육관을 운영하려한 게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계속 연습할 공간이 필요해 마련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아들과 손자를 가르쳐달라고 해서 시작했어요. 애들이 많아지니까 과외교습소로 교육청에 신고해 지금까지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1986년 다시 인천으로 왔다. 그 이유를 묻자, “고향이니까”라고 짧게 답했다.

인천은 한국에서 쿵푸가 처음 시작된 곳

▲ 1894년에 지어진 ‘의선당’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중국사원이다.
“한국에서 인천에 중국 무술이 처음 들어왔어요. 사업하는 사람과 연관이 있는데, 1883년 개항 이후 중국에서 사업하는 사람이 배로 물건을 싣고 인천에 오는데 배 안에 사고도 많으니까 보디가드의 역할을 하는 사람과 같이 움직였대요. 그 사람들이 무술 실력자였던 거죠. 그러다 중국인들이 지금의 차이나타운에 많이 정착하면서 의선당이 생겼습니다”

1894년에 지어진 의선당(義善堂)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중국 사원이다. ‘의를 지키고 착하게 살자’라는 교훈이 담겼다. 개항 후 중국 산동성을 중심으로 해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건너온 중국인들은 이국땅에서 잘 적응하며 살기 위해 스스로 교화기관(敎化機關)을 만들었다. 의선당은 단합하며 살아가려는 화교들의 끈기와 생명력이 담겨 있다.

“당시 인천에 정착한 중국인들 중에 술과 아편에 취해 사는 사람이 많았대요. 의선당은 운동도 하고 마음을 다잡기도 했던 소중한 곳입니다”

1931년 7월, 중국 지린성 창춘현 만보산 지역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에 큰 충돌이 일어나는데, 이를 ‘만보산 사건’이라고 한다. 당시 중국과 조선의 민족운동세력이 형성한 반일 공동전선투쟁을 분열시키기 위한 일본의 음모였다. 1930년대 땅을 빼앗긴 조선인들은 중국 만주지역으로 이주했고, 중국 농민들과 갈등이 생겼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만보산 지역에서 조선인이 중국인에 의해 살해됐다는 허위 정보에 분노한 조선인들은 화교가 많이 사는 서울ㆍ평양ㆍ인천ㆍ부산 등지에서 화교들의 집과 가게를 공격했다.

“전국에서 큰 난리가 났죠. 평양에서도 화교들이 몇 백 명 죽었던 때였는데 인천 차이나타운만 아무 일이 없었어요. 무술 하던 사람들이 다 모여서 화교들을 보호해줘서 그랬다고 합니다. 그런 경험을 했기에 일제강점기엔 한국 사람한테 무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해요. 가르쳐주면 우리를 때릴 수 있으니까 화교들한테만 무술을 가르쳐줬다고 노인들이 얘기하더라고요”

한국전쟁 때 의선당에도 포탄이 많이 떨어졌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수리한 후 한국 사람도 화교들로부터 무술을 배웠다고 한다.

화교가 없는 화교역사관

▲ 홍콩 이소룡박물관에 있는 것과 동일한 동상이 있다.
필 관장은 10년 전부터 무술박물관 개관을 고민했다. 무술과 관련이 있는 것들을 모은 건 훨씬 오래됐다. 지인으로부터 전해 받거나, 돈을 주고 구입한 물건도 상당하다.

“1970년대부터 모았어요. 그때는 박물관을 열겠다는 생각은 없었죠. 그러나 차이나타운이 번성하고 짜장면집이 많이 생기면서 차이나타운에 짜장면만 있는 게 아니라 중국의 다른 문화도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습니다. 인천시와 중구에 협조를 요청했는데, 지원받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짜장면을 먹고 나서 구경할 게 있다면 차이나타운도 활성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행정기관의 협조를 구했지만 쉽지 않았다. 차이나타운에서 음식점을 하는 친구들의 도움과 용기로 박물관 건립을 시작할 수 있었다.

“차이나타운 근처에 짜장면박물관과 화교역사관이 있어요. 짜장면박물관에서 화교에 대한 얘기를 부분적으로 전시해요. 화교박물관을 지어 그곳에서 짜장면에 대한 얘기를 부분적으로 해야하는데 거꾸로 된 거죠. 화교역사관에는 화교의 역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화교가 한 명 있어야 하는데, 없어요. 화교를 제외하고 화교와 차이나타운을 얘기할 수 없습니다. 화교역사관에는 볼만한 물건이 많지 않습니다. 화교의 협조를 얻으면 유물을 더 모을 수 있어요”

필 관장의 얘기는 한참 더 이어졌다. 대만이나 중국과 교류하는 데도 화교들이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활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인천시는 매해 차이나타운에서 중국문화축제를 해요. 예전에는 화교단체들이 연합해서 행사에 참여했는 데, 지금은 이벤트 기획사에 맡겨버리니까 별 내용이 없어요. 우리가 대사관에 얘기하기도 편해서 내용도 풍부해질 수 있을 텐데, 그게 많이 아쉽습니다. 의선당 하나로도 중국 문화관광 사업을 할 수 있어요. 의선당 안에 모신 신들이 있는데 신마다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 문화가 많이 연관돼있고 화교 역사도 있으니까 얘깃거리가 엄청 많지만 개발하지 않고 않습니다”

개인이 운영하는 데 한계 있어

▲ 박물관에는 무술관련 100년이 넘은 역사가 사진으로 전시돼있다.
한국무술박물관을 개관하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다쓰러져가는 건물을 새로 짓고 준비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이 들었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필 관장도 개인이 운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이곳 박물관에는 인천에서 활동한 스승들의 사진과 그들이 사용했던 100년 된 검과 여러 무술용품이 있다. 필 관장이 선수로 뛸 때의 선수증과 대회 팸플릿도 있다. 그의 스승이 입던 도복도 박물관 한쪽에 전시돼있다. 그 도복은 스승의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 준 옷이라고 한다. 중국의 소림사 주지가 한ㆍ중 수교 10주년 때 방한해 필 관장에게 선물로 준 달마상도 액자에 걸려있다.

“홍콩 이소룡박물관에 전시된 것과 같은 이소룡 동상을 중국에서 제작해 갖고 왔는데 제작비보다 운반비가 더 비쌌어요.(웃음) 개관하고 박물관 밖에 전시했는데 아이들이 하도 올라타서 안으로 들여놨습니다”

이곳 박물관이 비좁아, 필 관장은 자신이 모은 물건의 3분의 1만 전시했고 나머지 3분의 2는 아직도 창고에서 빛을 보지 못해 안타까워한다.

월요일에는 휴관하고 평일이나 주말에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만 개관한다. 그 외에는 체육관을 운영해야하기 때문이다. 주말에는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서 무술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가르쳐야한다. 그래야 그 수입으로 박물관도 운영할 수 있다고 필 관장은 덧붙였다.

“이곳은 항상 열려있는 곳이 아니라, 관심 있는 사람들이 주로 찾아와요. 운동하는 개인이나 동호회 사람들이 인터넷 기사를 보고 미리 연락하고 오죠. 중국 무술의 발상지가 인천이라는 거를 아는 사람들이니까 일부러 찾아오는 겁니다. 다른 욕심은 없어요. 무술박물관이 조금 더 커져 창고에 있는 물건을 전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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