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봄, 미국 유타주의 스컬 밸리라는 산등성이에서 양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 3월 14일, 양 한 마리가 쓰러져 죽었다. 3일 후 죽은 양의 수가 3000마리로 늘어나더니, 며칠 사이 총6000여 마리가 순식간에 죽었다.

이 참사의 원인으로 의심받은 것은 군 연구시설인 더그웨이 연구소였다. 육군 생화학무기 실험을 담당해온 더그웨이 연구소는 양떼가 죽은 지역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처음에 육군은 양들의 죽음이 자신들과 관계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죽은 양의 조직에서 소량의 신경가스(VX) 물질이 검출됐다. 이후 최초로 죽은 양이 발견되기 하루 전인 3월 13일, 연구소가 VX를 공중에 살포하는 실험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해진 장소에 뿌려져야했을 VX가 미처 다 살포되지 않은 채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중, 불행하게도 양떼가 있던 스컬 밸리로 흘러든 것이다.

이 사건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과 논란거리를 던졌다. 1969년 닉슨 대통령은 모든 화학무기실험을 금지하겠다고 선포할 수밖에 없었고, 1970년대 미국 환경운동과 반전운동을 이끈 중요한 계기가 됐다.

 
VX는 1952년 영국의 한 화학자가 살충제를 개발하던 중 발견한 물질이다. 이것이 사람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안 영국은 상업적인 연구를 중단했다. 대신 영국은 VX 제조법을 미국에 넘겼고, 미국은 이를 사들여 VX 대량생산에 돌입한 것이다.

VX는 실온에서 액체와 기체 상태로 존재한다. 코나 입, 피부를 통해 몸으로 흡수되면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의 분해를 막아 근육의 수축과 이완을 마비시킨다. 근육은 팔뚝과 종아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폐 아래쪽에 있는 횡격막(가로막)이 마비되면 공기가 몸 안으로 드나들 수 없어 결국 몇 분 안에 질식사하게 된다. VX는 지금까지 인간이 발견한 신경작용제 중에서 가장 독성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장품 샘플 하나 정도의 적은 양(10밀리그램)으로도 죽음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VX는 대량살상무기에 속한다.

VX가 대량살상무기로 처음 알려진 것은 1988년 걸프전 때다. 당시 이라크 후세인 정권이 쿠르드족 거주 지역에 VX를 살포해 수천 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1991년 유엔(UN)은 VX를 대량살상무기로 분류했고, 1997년 발효된 화학무기금지협약도 VX의 생산과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최근 ‘김정남 암살 사건’으로 VX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한 화학자가 우연히 생명을 죽이는 물질을 발견했고, 다른 나라에 기술을 팔았고, 어떤 나라는 기술을 사들여 이를 대량으로 만들었고, 또 다른 나라는 그 기술을 베껴 정치적인 이유로 누군가를 암살했다. 모두 인간이 벌인 일이라 생각하니, 오늘도 그저 살아있다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려야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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