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장렬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 언론학 박사과정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는 권력의 기초로서 국민주권의 원리를 뜻하며,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의미한다. 민주적인 법치국가라는 것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이곳에서 형성되는 사람들의 의사(생각)를 원천으로 하는 국가이다. 유럽, 특히 독일 사회는 공공성에 대한 다양한 논의로 민주주의 국가를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공공성이란 진리의 공간이 아니다. 단지 의견의 공간이다. 의견은 그리스어로 ‘doxa[독사]’이다. 의견이란 ‘나에게는 이렇게 보인다(dokei moi)’라는 세계에 대한 관점을 다른 사람을 향해 말하는 것이다. 세계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각 다른 방식으로 열려있다. 공공적 공간에서는 이 다름을 서로 분명하게 하는 데 있지, 이 다름을 하나의 합의를 향해 수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독일의 역사에는 모든 사람을 단일한 의견으로 묶으려했던 나치의 이데올로기가 있다. 그 결과 무한한 복수성을 지닌 사람들은 사라지고 단수의 인간, 즉 하나의 종족과 그 유형만 존재하게 됐다. 다수의 의견 속에서 하나만이 부상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물론 세계는 나치의 역사를 비판했고, 반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또다시 나타나고 있다. 다양성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공간에서 형성되는 세계는 사라졌고, 단수의 인간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바로 공공적 공간을 상실한,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우리 사회의 공공적 공간을 파괴한 정치적 폭력이다. 반정부 인사나 단체를 구분해 통제하고 관리했던 정부 관료들이 줄지어 재판을 받고 있다. 그리고 세간의 관심은 조윤선ㆍ김기춘에서 몸통 박근혜로 쏠리고 있다. 이에 반해, 블랙리스트에 거론된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새 세상을 얻은 순간이다.

그러나 이번 블랙리스트 사건의 전말은 우리 사회가 얼마큼 공공성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 없으며, 헌법에 명시된 법률적 조항들이 문자로만 기능하는 사회인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더 나아가 촛불집회라는 일련의 사태가 김기춘과 박근혜를 법정에 세우게 했으나, 권력의 근간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님을 자명하게 하고 있다. 이는 촛불집회의 한계이기도 하다.

타인의 의사를 부정하고 자신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려는 권력자들의 노력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국가정보원과 국가보안법이 지배세력을 위해 악용되고, 줄곧 이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수성보다 단수의 인간이 되게 강요했던 억압의 역사, 즉 정치적 폭력의 역사를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권력자들과 블랙리스트의 친밀함이 새롭지 않을 뿐이다.

국가기관이 관제 집회를 조직하고, 좌파 세력에서 또다시 ‘종북’ 좌파를 구분했던 우리 사회는 이미 세계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거부했던, 공공적 공간이 부재했던 사회다. 나치의 국가적 폭력이 오늘날 반복된 사건이다. 그러나 이 같은 엄청난 국가적 폭력에 너무나도 관대하게 대처하는 모습이다.

블랙리스트 사건은 박근혜 정부를 문재인 정부로, 야당을 여당으로 바꾸는 정치놀음이 아니다. 핍박받던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위로하고 몇몇 주동자를 징벌하는 우리 사회의 관용은 공공성에 대한 무지이며, 민주주의를 망각하고 있는 다수의 침묵이다. 나치의 역사적 교훈을 상기해야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지 확인해야한다. 세상에 대한 관점을 다양하게 해야할 때이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