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람] 서은미 사진작가

지난 18일 오후 2시께, 인천 중구의 한 커피숍에 중년의 여성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강냉이ㆍ귤ㆍ붕어빵 등이 들려있었다. 모임 구성원들과 나눠 먹기 위해 사온 것이다. 서은미(51) 사진작가는 그들에게 화장실 가서 비누로 손을 깨끗하게 씻고 올 것을 주문했다. 그래야 사진에 지문이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스승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따랐으며 “우리 스승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라고 기자에게 귀띔했다.

지난해 봄부터 모인 이들에겐 비슷한 연배의 인천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후지필름의 사진철학인 ‘인생의 찍는 즐거움’을 깨닫자는 취지로 시작한 모임은 사진으로 자신의 얘기를 담아내고 있다. 다음 달 중구 경동의 갤러리 겸 카페인 ‘극장앞’에서 사진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이 모임에 앞서 서은미 작가를 만났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친근한 사진세계

▲ 서은미(맨 왼쪽) 작가와 사진모임을 하는 사람들. 이들은 자신들이 찍은 사진으로 2월에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6남매의 막내로 덕적도에서 태어난 서 작가는 축현초등학교 입학 무렵 뭍으로 나왔다. 인천에서 초ㆍ중ㆍ고교를 졸업한 그녀는 대학은 서울에 있는 학교로 다니고 싶었지만 인천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아버지의 영향으로 1986년 인하대 공대에 입학했다.

졸업 후 IT관련 회사에 취직했다. 입체영상 관련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일을 하다 스틸 컷이 필요해 업무와 연관된 사진을 찍게 됐다. 그러나 그때 처음으로 사진을 접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가 항상 기록사진을 많이 남기셨어요. 지금도 서재 한 면이 다 사진앨범이에요. 1929년생이신데 학생 때부터 찍은 사진이 있어요. 필름이 장전된 카메라가 집에 늘 있어 남매들이 취미로라도 다 사진을 찍었어요”

서 작가의 아버지는 서재송(88)옹이다.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투쟁위원회 대표이자 한국전쟁 이후 고아나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 혼혈아들을 보살피고 해외로 입양 보내는 일을 해온 사람이다. 서재송 옹의 손을 거쳐 입양된 아동이 1600여명이나 된다. 서씨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몇 년에 한 번씩 입양인들을 만나러 해외에 가곤 한다.

“최근에 아버지 얘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 전에는 아버지의 명성에 누가 될까봐, 아버지의 아우라가 너무 커서 내 아버지가 누군지 밝히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사진 작업을 하면 할수록 뼛속깊이 ‘아버지 딸’이라는 자각을 해요. 기록하려는 속성이 아버지를 닮은 거 같아요”

중학교 때부터 아버지의 ‘올림포스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시위가 많던 대학시절에는 시위 사진을 찍었다. 그녀에게도 사진 찍는 일이 일상이 되어갔다. 그러다 일과 사진이 접목된 사업을 했고 본격적으로 사진을 배우려고 사진공부를 시작했다.

카메라가 폭력의 도구여서는 안 된다

▲ 서은미 사진작가.
서 작가는 인물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특히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게 관심이 많다. 그녀는 사회적 약자들한테 카메라가 상처가 될 때가 많아 더욱 유의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분들한테 카메라를 들이대면 위축이 돼요. 그런데 아직도 그렇게 작업하는 작가가 많은 게 현실입니다. 그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가난한 나라에 가서 망원렌즈로 밝게 웃는 아이나 노인을 찍어서 전시하는 사람이 많아요. 사회윤리의 문제라고 봅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사진을 찍어오라고 숙제를 내줘요. 드라마틱한 걸 찍겠다고 폐휴지를 줍는 노인들을 찍어오는 친구들이 있어요. 저는 카메라를 드는 게 먼저인지, 경사진 길을 오르는 노인을 도와줘야하는 게 먼저인지, 물어요. 사진을 왜 찍으려 하는지 질문을 던지는 거죠”

알 듯 말 듯했다. 그래도 카메라에 담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순간포착’의 의미를 담아 다시 질문했다.

“사진을 찍는 건 순간이지만 상황을 예측하고 기다리는 건 길어요. 저는 기다림이 더 중요하다고 봐요. 설령 ‘순간’을 놓쳐 위대한 작품을 못 건지더라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않을까요?”

서 작가는 ‘독수리와 소녀’라는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케빈 카터의 예를 들었다. 사진은 아프리카 전쟁터에서 뼈가 앙상한 소녀가 기도하는 자세로 땅바닥에 엎드려 있고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독수리가 앉아있는 장면이었다. 이 사진이 1993년 뉴욕타임즈 1면에 컬러로 실리자마자 화제를 일으켰고 이듬해 퓰리처상까지 받았다. 그러나 촬영을 집어치우고 먼저 소녀를 구해야했다는 비판이 들끓었고, 케빈은 상을 받은 지 한 달도 안 돼 자살했다.

“그가 찍을 수밖에 없었던 건 내전으로 잘못 없는 어린 아이들이 고난을 당하는 걸 알리려했던 거였어요. 아이가 위험했다면 그 사진을 안 찍었을 거예요. 저는 ‘찰나의 순간’이란 표현을 좋아하지 않아요. 물리적인 시간이 담보돼야 합니다. 이런 나를, 아들은 고루하다고 말하죠(웃음)”

서 작가는 1990년대 중반 인천에 살고 있는 화교들의 사진을 찍겠다고 구상했다. 그러나 바로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았다. 그들과 몇 년간 어우러지며 얘기를 나눴다.

“2~3년 정도 지나니까 오히려 그들이 왜 사진을 안 찍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리고선 결혼사진을 찍어 달라, 손자 백일이나 어머니 장례식을 사진으로 기록해달라는 요구를 해오더라고요. 물리적인 시간과 간격이 좁혀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봐요. 주변에서는 속 터질 수 있지만 급하지 않고 그렇게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

▲ 서 작가는 매주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여해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사업과 사진 찍기를 병행하다 서 작가는 10년 전인 2007년부터 전업 작가의 길로 나섰다.

“큰 애가 중학교 2학년 때 희귀질환 진단을 받았어요.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고 아이를 계속 돌봐야 해서 일에 집중할 수도 없을 때였죠.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었어요. 심지어 친언니하고도. 아이가 희귀질환이다 보니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이 많아졌죠. 처음엔 정보공유 차원에서 관련 협회 활동을 했는데 하다 보니 내가 앞장 서 있더라고요. 관련 법안 공청회에 다니거나 국회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보다 못해 아이 주치의가 저보고 ‘전투적으로 살지 말고 일상으로 받아들여라’라고 조언하셨죠. 어느 날 아이가 ‘엄마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가족과 친구들하고도 단절한 엄마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한 거죠. 어린 나이지만 자기가 보기에도 이건 아니다 싶었나 봐요”

서 작가는 아이의 말을 듣고 일을 계속 할 수 있을지 고민했지만 집중이 안 돼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진 작업은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서 가능했다. 아들만 둘을 낳은 서 작가는 지금도 정기적으로 첫째 아들과 병원에 간다. 병원에는 자신의 아들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인 환자가 있고 그를 돌보는 가족들이 있다. 병원을 다니며 그들의 고통과 갈등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가족들의 갈등도 있지만, 간병인 문제도 있어요. 예전에는 60~70대 여성이 많았는데 어느 날부터는 50~60대 남성으로 바뀌더니 요즘은 방학 때 대학생이 간병인을 하고 있더라고요. 모든 게 사회적 문제와 연관돼있습니다”

풍경보다 인물 담는 걸 좋아한다는 서 작가는 유명인보다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찍는 걸 더 좋아한다.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한 후 인천에 대한 첫 작업으로 ‘인천-이지안, The INCHEON-izian’을 했다.

“‘인천사람들’이라고 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빠리지엔’처럼 영어식 발음으로 뒤에 붙여봤습니다. 인천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을 찍어서 인천에서 첫 전시회를 했죠. 그 작업을 하고 나서 인천을 상징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작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만석동 화수부두에서 선장을 찍은 적이 있어요. 생각이 이어지다가 ‘화교’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다녔던 축현초교가 차이나타운 근처라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어요”

최근에 마무리하는 작업은 ‘만신’이란다. 천주교 신자인 그녀가 만신 관련 사진작업을 한다니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있다고 덧붙였다.

▲ 실제 굿을 하는 와중에 만신이 거울을 보는 장면을 포착한 사진이다. ‘만신’ 사진전을 올 여름이나 가을에 열 예정이다.
중요무형문화재인 만신 김금화 선생의 신딸인 김매물ㆍ이옥자씨가 굿을 하거나 무속 관련 작업을 하는 걸 카메라에 담았다. 만신들의 내면을 보고 싶어서 시작한 작업이고, 지난해 전시를 하려다 시국이 어지러워 올해로 미뤘다. 여름이나 가을경 전시회장에서 사진으로 만신들을 만날 수 있다.

“만신 작업도 인천을 대변할 수 있는, 인천의 고유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가 나온 거예요. 만신도 사회적 약자이자 소수자죠. 사라지고 희석돼가는 것을 기록할 필요가 있어요. 인천을 대변할 수 있는 소재들에 더 애정을 갖습니다. 인천이 해양 도시인데 부산이나 목포와 달라요. 물을 접할 순 있지만 철조망으로 가로막혔어요. 그런 고민을 하다 만나는 게 만신이었죠. 만신은 어떤 사람들이고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런 궁금증으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화교나 만신 등, 사회적 약자에 관심과 애정이 많은 서 작가는 요즘 매주 토요일 광화문에서 열리는 촛불집회에 참가한다. 지난 12차 촛불집회 때는 강추위가 몰려와서인지 부쩍 참가자가 줄어 속상했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JTBC>에서 하는 ‘김제동의 톡투유’를 봤어요. 한 초등학생이 엄마가 토요일마다 광화문에 가느라 밥을 안 준다고 하면서 토요일에 가족이 함께 밥을 먹게 해달라는 게 올해 소원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매주 토요일 광화문에 갑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는 건데 카메라는 항상 갖고 다니는 게 습관이라 사진가로서 현재를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에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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